겨울에서 봄 사이로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냉정과 열정사이

2025-02-21     전고필
냉정과 열정사이의 변산바람꽃.

 전화로도 연락되지 않던 친구들은 간혹 SNS에 자신의 안부를 고백한다. 자랑질이 아니라 군중사이의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지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함에 미량의 미안함이 함께 한다. 오래전 통영에서 강제윤시인과 매화를 보며 통음을 할 때 낭독했던 시가 생각난다. 김명인 시인의 통화라는 시가 온몸에 짜릿하게 파고든 시간이었다.

 “광섬유의 신경올을 통과하는 말들이라면/ 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나는 화창한 봄날 뜰 한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텔레파시의 신호음 보낸다/ 세 번만 벨이 울리거든/ 마음의 기미를 듣고서 내게 응답해다오/ 햇님의 통화로 땅 깨어나듯/ 시듦 없는 사랑은 먼 숨결로도/ 애송지 마다의 새싹 촉촉이 적셔놓는다/ 발 벗는 마음에도 말씀의 날개 달아맨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들은 꽃들끼리/ 어느 것도 서로의 기미에 응답않는 기적이란 없다/ 잠시 전 바람결로도 이미/ 수많은 파장 건너갔으므로/ 일손 놓고 바라보면 앞산 수풀조차/ 빗살무늬로 파랑이지 않느냐”

눈의 진저리.

 눈 쌓인 2월의 월출산

 그런 고백에 대한 응수로 다시 통화를 시도하며 마침내 말씀이 신경올을 타고 도달하자 어느 눈쌓인 2월에 월출산에 오르자고 권유했다. 사람이기에 외로운 것이고 그러기에 또 만나야 하는 법. 벗들은 거절하지 않고 영암으로 모였다.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이른 아침이 되어 문을 열어보니 온세상이 하얗다. 밤사이 백색의 계엄령이 다녀갔고 세상은 고립무원의 경지로 가는 듯 고요했다. 제설차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야 할 것인지 길을 나서야 할 것인지 크게 망설일 필요가 없다. 이미 따끈한 국물을 먹어야 할 것을 몸이 요구하고 있어서다. 그렇게 월출산의 천황사지구 장어탕집에서 속을 달랜다. 이렇게 진한 탕은 처음이라며 영암과 장어탕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1981년 영산강 하구언이 들어서기 전까지 여기는 기수구역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바닷물이 강물을 밀어 올리는 힘이 거세어 나주 영산포에 배가 뜰 정도로 조간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곳을 알 턱이 없다. 그저 영산포 등대가 상징하는 여기도 배가 들어왔군 하며 고개 끄덕였을 뿐, 풍경에 불과했을 터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물길이 참으로 웬수가 되기도 했고, 고마움이 되기도 했다. 뻘에 의지해 사는 이들에게 질좋은 갯벌은 바지락과 낙지의 천국으로 영암을 만들어 주었으며, 봄이면 알밴 숭어들이 몰려오면 그 뱃속 숭어알을 꼬닥꼬닥 말리고 기름칠하여 어란을 생산해내는 깊은 맛의 고장으로 영암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터이다. 그러니까 1981년은 영암인의 삶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다. 박찬일 셰프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던졌을 때 무릎을 치며 그렇지 라고 강하게 동의를 하던 기억이 영암에서 되살아났던 적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분들은 장어도 회로 드시는 분들이야. 거기에 운저리회, 짱뚱어회도 드시고 나도 따라 먹은 적이 여러번이라고 말하며, 바닷물이 들어오는 길목이었으니 민물장어는 냇가 곳곳에서 잡아먹었고 그런 식습관이 장어집을 존속하게 했고, 덩달아 장어양식장도 많이 생겨난 이유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영암 기찬묏길 표지판.

 눈 덮인 월출산 아침, 기찬묏길로 향하다

 산천을 닮은 사람들이란 흔한 얘기를 영암인들의 음식에서 끄집어내고 이제 우리는 백설이 가득한 월출산 국립공원 입구에 섰다. “입산금지” 간밤의 적설량이 남긴 파장이 안내 푯말로 가로 막았다. 그래 대안으로 기찬묏길에 섰다. 4.8KM 정도로 기억되는 기찬재 게스트하우스까지 걸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다가 중간에 마을로 내려가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기로 결정하고 길을 걸었다. 벌써 몇분들이 걸어간 발자국이 선명하다. 유독 습설이 많은 해라서 뽀드득 소리를 내며 내 체중의 지문이 눈에 박히는 기분도 상쾌하다. 넓지 않지만 좁지도 않아 오솔길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미안한 감이 있는 이 길에 나는 여러번 걸었었다.

탑골약수터 정경.

 이처럼 벗들과 서 본 것은 처음인지라 도란 거리며 지나온 이야기를 회고하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며 주변의 안부까지 살펴지는 대화는 끝이 없었다. 무거운 눈을 뒤집어 쓴 시누대 군락은 터널을 형성하며 색다른 분위기를 안겨주고, 이 산자락 길섶의 동백나무와 사스레피나무의 푸른 잎도 눈바가지를 형성하여 진저리를 치는 것으로 느껴졌다. 사위가 모두 하얀 세계에서도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눈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탑동약수터에 이르렀다. 제복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얀 눈속에서 황금무늬 식나무 잎으로 입에 물리워 마치 풀피리를 불 듯이 흘러내리는 정경이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감동이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싶어졌다.

동심처럼 눕다.

 새실 마을과 기찬묏길의 설경

 다시 걸음을 옮겨가다 누군가 분묘 이장을 한 듯 커다란 개활지가 나왔다. 한 친구가 벌러덩 누워 버린다. 나도 순간 그 곁에 누워 버렸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이런 짓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친구들의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눈이 유년의 기억으로 끌고간 탓이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눈을 털어내고 다시 걸어 새들이 많아 이름 지어졌다는 새실 마을로 빠져나와 마을 곁으로 흐르는 계곡과 족히 100여살이 된 동백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카페 새실에서 커피 한잔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성풍사지 5층석탑.

 휴식을 마치고 묏길로 올라서 가다 앞사람의 발자국을 제대로 보지 못해 성풍사지 5층석탑에 이르렀다. 탑이 보이면 길을 잘못든 것인데 눈길은 이마저도 불안하지 않게 만들었다. 다시 오던 길을 돌아 제자리를 찾았다. 숲의 터널이 형성된 곳에서 짓궂은 친구가 동백나무 가지를 낚아채듯 건드린다. 그야말로 눈의 진저리 같은 폭설이 쏟아진다. 그 옆 동백에게도 이런 제스처를 요구하니 멋진 상황사진이 나온다. 그래 기왕 온 눈이니 산속에서는 좀 즐겨도 되겠지 하며 스틱을 이용해 이 나무 저 나무에 얹힌 눈을 털어내고 또 그 광격을 감상했다. 어느 사이 우리는 목표했던 종점에 이르렀다. 흙 한 점 만나지 못한 걷기 여행의 마지막은 다음을 기약하는 이별로 이어졌다. 친구들을 보낸 다음날 오후 홀로 왕인박사 유적지에 이르렀다.

기찬묏길2길에서 만난 왕인석상과 책굴.

 홀로 걷는 왕인박사 유적지

 기찬묏길 제2구간 왕인문화체험길를 걷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어제보다 눈이 더 많이 녹았지만 크게 아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과 혼자가도 안전한 길이라는 믿음이 그 길 위에 서게 한 것이다. 8KM 정도되는 구간이면 족히 3시간이면 돌파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늘 그렇듯 해찰을 하고 말았다. 구간 중간 죽정마을에서 이어진 산길에는 종이를 만들었던 지침바위와 학문을 연찬했다는 문산재와 양사재가 있고 그 꼭대기에는 왕인박사 석상과 책굴이 있으니 내쳐 돌아보게 만들었다. 동쪽으로 도갑저수지가 내려 보이고, 서쪽으로 영산강과 뜨락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 바로 정상이었다. 마침 어느 곳보다 꼿꼿하게 자란 노간주 나무가 바위사이에 서 있어 그 아래 좌정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하산했다. 합류지점에 이르니 구림갈비와 더불어 숲이라는 카페가 곁들여 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한잔에 원기를 보강하고 다시 눈쌓인 길을 해치며 이 길의 마지막 코 앞인 대동저수지에 이르니 4시간 여를 걸은 셈이 되었다. 이틀에 걸친 눈속의 걷기는 크게 분투하지 않고 즐겁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1주일후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난주 못 간 월출산에 가자고. 그래 하면서 만난 친구와 아침 날씨를 보니 산에 가도 시야가 모두 가려지는 대기질을 핑계로 꽃구경을 가기로 했다. 그때 내렸던 눈이 아직 녹을 여유도 없는 날이었지만 햇살은 비추었기 때문에 뭔가 기대감이 있었다.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영암이 아닌 곳으로 1시간여를 이동했다. 갈림길에 차를 두고 서성이는데 꽃사진을 찍고 내려오던 한분이 안경을 두고 왔다고, 지금은 꽃대 올라온게 두송이 뿐이니 갈 필요 없다고 우리를 버리듯이 말한다. 길도 모르고 그냥 근처일것이라는 촉으로만 온 나는 그래도 궁금하다고 그분의 뒤를 따랐다. 십오분 정도 임도를 걷고 다시 골짜기로 5분정도 걸으니 발자국을 조심해야 할 지점이 나온다. 한송이 두송이 세송이...

변산아씨로 불리는 변산바람꽃.

 다시 찾은 벗과 변산바람꽃을 찾아서

 그분이 안경을 두고 온 사이에 변산아씨가 활짝 꽃대를 올렸나 보다. 분명 내려갈 땐 두송이였는데 다시 오니 두배 이상의 봄이 거기 있었으니 말이다. 돌무더기와 나무뿌리 사이를 조심스레 다니며 변산바람꽃과 눈을 마주한 한시간이 그 어느날 보다 벅차게 생각됐다. 2000년 초반 처음 만난 변산에서의 조우가 드문드문 이어져 다른 지역에서까지 확인되고, 그 시간이 2월 중순으로 변함없다는 사실이. 차가운 눈이 녹으며 얼음과 눈의 중간계에 달하며 쌓인 곳 바로 곁에서 고군분투하며 기어코 꽃을 피워내는 야생의 본능에 감사한 냉정과 열정사이의 여행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