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대하는 삶의 자세] ‘결호작전’과 제주도
태평양전쟁 요충지...일본 교두보 구축 오키나와 대신 태평양전쟁 최후 전장 될 뻔
벌써 제주도에는 꽃 소식이 한창이다. 동백과 유채 등 봄꽃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제주도가 80년 전에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가 될 뻔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의 격전지였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비대 10만 명이 전멸하고 민간인도 약 10만 명이 희생됐다. 미군의 사상자도 약 5만 명에 달했다. 미군이 한 지역의 전투에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해방될 무렵 제주도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었는데, 만일 마지막 격전지가 오키나와에서 제주로 바뀌었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과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초반의 전황은 일본이 압도적인 기세로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을 시작으로 5월에는 필리핀을 침공, 개전 이후 6개월 만에 동남아의 영국령과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령을 거의 장악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단어는 1942년 1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의 의회 연설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슬로건은 표면적으로 아시아 민족이 자신의 힘으로 백인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아시아 민족의 공존공영을 꾀한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일본의 동남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기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이 바로 반격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1942년 4월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일본 본토를 공습했고,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 4척과 순양함 1척을 침몰시켰다. 8월에는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솔로몬 해전에서 승리하자, 전황의 향배가 완전히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사건은 1944년 7월 사이판의 함락이었다. 사이판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2400km 떨어진 곳으로, 도쿄까지 폭격기가 왕복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했다. 이곳이 함락되면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전역이 미군 폭격기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된다. 사이판 전투는 양국의 입장에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전투였다. 결국 미국이 사이판을 함락함으로써 일본군 수비대 3만 명이 전멸했고, 민간인 3000명이 집단 자살했다.
사이판을 전진기지로 삼은 미국은 1944년 11월부터 B29폭격기를 이용해 연일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폭격했다. 사실상 태평양 전쟁은 이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만 일본은 마지막까지 일본 본토에서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좋은 전과를 얻어 강화조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했다. 이러한 최후의 희망을 ‘본토결전’이라 부르고, 육·해군이 합동으로 일본 본토를 방위하기 위한 작전을 ‘결호작전(決○作戰)’이라 한다. ‘결호작전’은 ‘결1호작전’부터 ‘결7호작전’까지 존재했다. ‘결7호작전’은 일본 본토 밖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작전계획으로 2~5사단 규모의 미군이 제주도와 한반도 남서부 일대로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최후의 방어라인을 설정한 것이다.
제주도는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동중국해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서 태평양 전쟁 발발 전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일본 해군은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1년 3월에 서귀포시 서쪽 대정읍 모슬포에 항공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5년에 60만 평방미터의 비행장을 완공했다. 바로 ‘알뜨르 비행장’이다. ‘알뜨르’는 제주말로 아래를 의미하는 ‘알’과 넓은 들을 의미하는 ‘뜨르’가 합쳐진 말로 제주도 아래쪽에 있는 비행장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제주도에는 일본 군대에 의해 여러 개의 비행장이 만들어 졌는데, 현재 제주공항이 위치한 ‘정뜨르 비행장’, 조천읍 신촌리의 ‘진뜨르 비행장’, 비밀 비행장인 ‘교래리 비행장’이 그것이다.
오키나와 대신 태평양전쟁 최후 전장 될 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해군은 96식 육상공격기를 사용해 난징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나가사키현에 있던 오무라(大村) 항공기지에서 출격했으나, 귀착지는 알뜨르 비행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오무라의 해군항공부대가 제주도에 주둔하게 되었고, 난징, 상하이 등에 대한 도양폭격 거점도 제주도로 옮겨졌다. 이와 동시에 ‘알뜨르 비행장’은 132만 평방미터로 확장됐다. 일본 해군이 제주도에서 난징에 공습을 가한 것이 36회에 달했고, 폭격기 600기가 동원되었으며, 폭탄 투하량은 300톤이었다고 한다.
1945년 2월 본토결전의 중요한 방위선인 이오지마(硫黃島)가 함락되자 제주도는 1945년 3월부터 결7호작전 지역에 편입되어 약 7만 800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됐다. 일본군은 제주도 해안을 둘러싼 해안진지를 구축했다. 만주의 관동군 등 각종 병기를 갖춘 군부대가 제주도 전 지역에 배치됐다. 특히 일본은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군사 요새화했다. 해군의 특공기지와 미로와 같은 갱도진지가 지하에 만들어졌고, 비행장의 방위를 위한 고사포 진지도 설치됐다. 이는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패전 무렵에는 제주도의 모든 촌락에서 10대 초반의 아이들까지 군사시설 조성 공사에 동원했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태평양 전쟁의 유물들을 보면서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이 두 번 다시 제주도를 비롯해 지구상에서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