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의 여의도 포커스]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권한대행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於人)’
# 몇년 전 언론에 소개돼 널리 알려진 진주의 김장하 선생은 유학 가문 출신이다. 출생지와 활동 공간이 서부 경남이니 ‘남명(南冥) 학파’의 유풍(儒風)이 짙다.
조선 중기 영남 우도를 중심으로 영남학파의 거두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며 생겨난 남명학파는 특히 실천적 학풍을 강조한다. 타협하지 않는 절개로도 유명하며 이 때문에 문하에서 임진왜란 의병장이 다수 나왔다.
광해군 시기 집권 세력이던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소멸되면서 남명학파도 쇠잔해졌으나 그 맥은 서부 경남을 아우르며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김장하 선생이 설립했다 국가에 헌납한 명신고등학교의 교명인 ‘명신’(明新)도 유학경전인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에서 따왔다.
선생의 14대조는 조광조 선생과 도의로 사귄 것으로 알려졌고 일제강점기인 1919년엔 그의 집안에서 남악서원을 건립, 김유신 장군과 유학자 설총, 최치원을 배향했다 한다.
조부 역시 향교 직분을 맡던 유림이었다. 조부는 집이 가난해 중학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 손자에게 한의학을 권했고 남성당이라는 한약방 상호도 정해주었다. ‘남성’(南星)은 남두육성(南斗六星)의 약자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이다.
환자들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가치를 둘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선생은 “할아버지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할 정도로 조부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선생은 30·40대 한약방이 성업을 이룰 때도 당시 서부 경남에서 한학자로 이름 높은 진암 허형 선생(1908~1995)을 찾아 <대학>을 배웠다. 이 인연으로 진암은 제자가 학교를 세울 때 명신이라는 교명과 함께 창립기문을 지어준 것이다.
진암의 스승은 마지막 선비로 알려진 중재 김황 선생(1896~1978)이다. 중재의 스승은 만국평화회의에 파리장서를 제출한 유림 137인 대표이자 한말 거유인 면우 곽종석 선생(1846~1920). 면우의 스승은 조선 6대 유학자로 이름난 한주 이진상 선생(1818~1886)이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역임한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한주는 기거하는 정자에 주자와 퇴계를 본받는다는 의미를 담아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齋)’라는 현판까지 달고 살아간 큰 학자였다”며 “김장하 선생은 서부 경남 출신이라 남명선생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학맥을 쫓아가면 퇴계와도 만난다”고 짚는다.
#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선생은 중학 졸업 후 친구들이 등교 할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엔 공부했다. 그리곤 열아홉 살 최연소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는다.
이후 남성당한약방을 50여 년 운영하며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온전히 지역사회를 위해 희사했다. 일평생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 온 것이다.
그의 조건 없는 지원은 사회, 문화, 예술, 언론, 환경, 역사, 여성 등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선생은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도왔다. 지금까지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천 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떠한 행사도,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이처럼 선생의 신조는 ‘줬으면 그만이지‘였다. 선생은 지원한 단체와 개인의 활동에도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이 평생 어떤 일을 했는지 그 전모를 파악하긴 불가능하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고 맘먹었다.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평생 자가용 없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에서 기거했으며 여행이라곤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역시 6.25 때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선생이 명신고 이사장으로 있던 때 전국적 이슈였던 전교조 해직 사태가 터졌다. 그때 선생은 당국의 압력을 받고도 단 한 명의 교사를 떠나보내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 단 한 건의 불, 탈법이 없었던 뒷심 때문이었다. 당시 샅샅히 훑던 담당자도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 ‘김장하’라는 이름 석 자는 2019년 지명된 문형배 헌법재판관 후보 인사청문회를 통해 다시 한번 회자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문 후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을 만나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무사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문 재판관은 청문회에서 “사법시험에 합격,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한 선생의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법관의 길을 걸어온 27년 동안 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했다”며 “선생의 가르침 대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왔다”고 담담히 말했다.
선생은 언론 접촉을 극구 사양한다. 선생이 남긴 단 한 편의 인터뷰는 명신고 설립 직후 학생기자와 가진 대담이다. 이 자리에서 일생의 신조로 <맹자>에 담긴 군자삼락 중 2락,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於人)‘을 언급했다. “하늘에도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김장하로부터 도움을 받은 문 재판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은 “제 뒤에 그와 같은 이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 그 문형배 재판관이 지금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라는 중책을 수행 중이다. 역시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인가 보다.
극우세력과 여당이 가짜뉴스까지 섞어 그를 집요하게 공격 중이다. 문 대행 ‘악마화’를 통해 탄핵 심판을 흔들고, 불복 명분을 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살다 살다 헌법기관의 권위를 훼손하는 ‘보수’정당까지 목격하게 된다. 일부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문 대행 자택까지 찾아가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국민의힘 의원들도 수차 헌재로 몰려가 ‘탄핵 심판이 공정하게 진행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적어도 ‘공정성‘ 문제라면 여당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지 않던가. 보수정당의 품위를 좀 지키면서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판결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