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기다려 ‘봄’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계절의 창가에서
3월이 오기전에 숙제같이 다가온 강박이 있었다. 거처하는 곳이 영산강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영암인터라 그 강에 압도 당한 탓인지 이곳이 탐진강의 발원지를 끼고 있는 지역이란 점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영산강의 발원지 용소 등을 마치 성지처럼 여기며 찾아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다녔더랬는데, 정작 내 곁에 있는 탐진강의 발원지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발원지를 장흥군과 경계에 있는 국사봉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자료를 통해 그곳이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에 있음을 알고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강의 발원지를 찾아서
마을 외딴집에서 SUV차량으로 십여분을 들어서니 수자원공사의 팻말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오십여 미터를 걸어 가니 낮은 빗돌에 탐진강 발원지 ‘성터샘’ 이란 글이 보이고, 그 아래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 우물처럼 조성한 탐진강의 첫물이 시작되는 공간을 형상화 하고 있다. 콸콸 쏟아지는 검룡소의 경험, 심장의 박동으로 피가 온 몸으로 퍼져 나가듯 솟구치는 황지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영암과 장흥과 강진 57km를 흐르는 동맥은 수량이 풍부한 여름이 아니면 늘 목마른 샘이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기대와 달리 초래해진 마음이지만, 진안의 데미샘에서 만났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방울 한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에 진입하는 것은 다 똑같은 이치이다. 하니 생겨난 말이 바다는 어떤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지 않는가.
사실 내가 물의 성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담양의 소쇄원에 기숙하던 1998년부터였다. 소쇄원을 관통하는 물은 단지 계곡으로서의 존재감을 넘어 인체의 피와 같은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정갈하게 하고 관조하며 사유하게 하며, 부족한 것은 채워내게 하고, 삿된 것은 씻어서 맑게하는 존재감으로서 당당하게 정 중앙에 모셨다는 정신이었다. 결국 우리의 누정문화는 이러한 물과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바위의 기반 위에 설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고려된 것이라는 점을 배웠었다. 물이 없는 성터샘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가져간 정전가위를 들어 주변의 잡목과 대나무를 잘라냈다. 다시 뒤돌아 저 물이 맑고 명징하게 출렁거렸으면 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3월을 시작했다.
기다려온 봄, 분주한 영암의 3월
두 번째 맞이하는 영암의 3월은 분주하다. 29일부터 4월 6일까지 진행해야 할 왕인문화축제가 한 해 농사의 시작이면서 또 모든 것을 규정하는 대형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내 기다려온 봄을 수수방관하기는 싫으니 몸과 마음이 더 분주해지는 계절이 되는 것이다.
읍내에 오래된 집을 빌어 기거하는 마당에는 집과 비슷한 연배를 가진 동백나무가 있다. 작년에는 2월초부터 꽃을 피워올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는 동박새를 꽃이 질 때까지 만날 수 있었는데, 유난히 적설량이 많고 바람이 세찼던 금년에는 아직까지도 꽃봉우리를 머금고 있다. 그 작고 앙증맞은 동박새가 그리워져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설 명절에 고향집에서 받아왔던 사과 한 개를 동백나무 가지 사이에 넣어두는 것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라는 시를 통해 산을 사랑하는 방법을 일깨워준 이원규 시인의 동박새를 맞이하는 신박한 방법을 재작년에 터득했던 터이다.
아닌게 아니라 단 하룻밤을 자고 이른 아침 방문을 열어보니 동백나무의 미세한 흔들림이 보인다. 그 사이로 무언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마침내 나 홀로 그리워했던 동박새가 출현해 준 것이다. 한동안 초점을 고정한 체 한 쌍의 동박새를 환대했다. 나의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어두운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몸짓이 커지면 아예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알기에 카메라의 셔터음조차도 꺼려지는 찰나들이었다.
3월 2일 아침의 첫 조우부터 여태까지 내 마음은 동박새와 “동백꽃을 줍다” 라는 이원규 시인의 싯귀로 스며들었다.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이런 구절이.
실내에서 피어나는 작은 봄들
동박새를 관찰하는 즐거움에 빠져들 때 집안으로 들여놓은 화분에서는 할미꽃이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연하디 연한 순을 올리며 솜털같이 하얀 외피로 치장한 모습이 가련하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난방이 안되는 방에서 계절의 감각을 응축해서 이렇듯 솟구쳐 오르는 순환의 질서에 나도 모르게 흠칫해졌다. 이제 드디어 봄이 격발된 것인가?
하긴 제주에서 씨앗을 받아온 한국 고유의 무궁화라 할 황근이 1월부터 싹을 올려 무럭무럭 자라더니 새로운 잎새를 틔워 올리며 올해는 더욱 성장할 것을 예고했었다. 게다가 잘하면 2년차에 꽃을 피울 기세 같아 볕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밖에 두고, 바람이 불면 방안으로 들이길 반복하며 노심초사 기대하고 있는 처지다. 봄이 완연하게 오지 않는데 나만 이렇게 안절부절하는 것인지 조바심에 애를 태우는 꼴이라니.
거기에 월동을 위해 사무실 안으로 옮겨온 작은 화분들에 눈길을 주니 이제는 새싹들의 아우성이 보인다. 참깨 씨방처럼 생긴 땅나리의 열매주머니에서 씨앗 꺼내 뿌려놨더니 씨에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씨를 우산 삼아 올리면서 발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도샤프란의 번지르한 검은 씨앗도 겨우내 잠들었다가 침 같은 떡잎을 두갈래로 들어 올리고 있다. 붉은 열매가 끈적끈적 달라붙었던 돈나무의 씨앗도 쌍떡잎을 피워내고 광합성을 하기 위해 고개를 남쪽으로 수그리며 연신 키높이를 올리고 있다. 재작년 낑깡을 먹고 뱉어낸 씨앗 몇 개를 화분에 두었더니 탱자나무 같은 모습으로 쑥쑥 자라나고 있다. 추워서, 광합성이 부족해서 시름시름 앓던 필리아 페페도 봄인줄 알았는지 생기가 돌아오고 그 옆에서는 어느 사이 화분을 나눠라는지 새끼치기를 해 두었다. 각각 식물들의 사생활은 알지 못하지만 모두 혼자서 그렇게 사즉생의 각오로 이 봄을 뿜어 올리는 것이다.
땅 위에서 서서히 움트는 생명들
모두 실내의 일이라서 건물 밖 저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산책을 나서본다.
작년 가로변에 심었던 수선화의 싹들이 4cm 정도는 지상부로 나와 대기와 접촉하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보인다. 금낭화의 싹은 아직 그냥인데 애기붓꽃의 싹은 볼펜심 정도 사이즈로 세상을 만나고 있다. 매발톱꽃도 바짝 땅에 착근하며 허공을 뚫고 솟구칠 예행연습을 준비하는 듯하다.
화순 도곡농협 온실에서 분양해 온 후박나무 3년생은 벌써 마주나기의 가지 층고를 3층으로 올리고 또 한번 기지개를 펼 준비 중이다. 멀구슬나무와 먼나무의 씨앗은 욕심꾸러기 새인 직박구리가 먹고 흩뿌리며 기찬랜드 주변 바닥에 널 부러져 있다. 하도 그 숫자가 많은데, 하필 발아율도 높아 농사를 짓는 이들은 논밭두렁에 멀구슬나무가 자라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베어내고 꺾어내도 기어코 자라나며 기세를 확장하는 이 나무에 손을 들어버린 이들도 많다고 전한다. 어쨋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는 봄은 어느 사이 사위를 애워싸며 오고 있다. 그들의 소리에 모습에 귀기울지 않고 눈길 주지 않는다면 삽시간에 가 버릴 봄. 이 봄을 혼자 기다려 혼자 만끽하기에는 아쉬울 터이다. 그래서 광양에서는 매화축제가 산동에서는 산수유축제가 열리고 내가 있는 영암에서는 왕인문화축제가 3월말 벚꽃이 팝콘처럼 터뜨리는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찾아나서지 않아도 되는 봄을 위해서는 정말 홀로 조용히 귀를 열고 눈을 더 크게 뜨고 어느 한 구역을 주목해 봄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봄은 영영 우리 곁에 다가서지 못할 터이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고, 그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는지 바이오필리아,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연과 접하며 살 수밖에 없음을 더욱 각별하게 느껴가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햇볕 조금만 비추어도 촉촉한 땅에다 관심을 주어 봄이 어떤가 권장하고 싶은 날이다. 네 곁에 봄이 침투했으니 말이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