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야생화 탐사, 땅과 가장 밀착한 시간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겨울 넘어 맞이하는 봄의 전령들
겨울을 보냈던 유년시절의 기억속에는 저수지로부터 흘러내리는 얼어버린 고랑 가운데 뻘층이 있는 곳에 삽을 들이밀어 퍼내면 미꾸라지가 뭉쳐있다가 꿈틀거리며 나오는 것을 잡아 내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추워서 곁에 장작불도 피우며 삽질을 내내 하지만 미꾸라지를 한 마리라도 건져내면 그 후론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겨울의 미꾸라지 잡기는 아무나 못하는 것이지만 그곳 고읍리에서는 나와 십여살 위의 큰집 형 둘의 전매특허와 같은 것이었다. 김장을 하며 말려두었던 시래기를 넣어 한겨울에 먹는 추어탕은 그야말로 진미 그 자체였다.
그런 재미난 추억을 소환하여 오늘 재현하고자 해도 이제는 개울이 사라졌고 논고랑도 건조하게 두고 겨울을 나는 것이라 재기해볼 공간 자체를 빼앗겨 버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겨울의 이색적인 추억은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신안 안좌도 같은 섬으로 낚시를 가는 것이지만 이 또한 십수년 하다보니 뉘가 난다. 등산을 하거나 트레킹을 하는 것 말고는 이렇다하게 꽁꽁 언 몸과 마음을 이겨내는 공식은 없었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2월에서 3월까지의 기간이다.
봄의 전령, 복수초가 전하는 소식
다만 2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식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바로 봄의 전령 복수초가 피었다는 뉴스다. 올해는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눈을 뚫고 피어난 복수초 사진이 다른 어느 곳 보다 먼저 전파되었다. 짐짓 저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인공의 정원에 인위적으로 증식해 온 복수초는 이미 야생성이 거세된 것일 터인데 라는 내 선입견이 작동된 탓이다. 그럼 진짜는 어디서 필까 궁리해보면 완도의 수목원 쪽 사람 손길 닿지 않는 상봉에서 개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변산반도쪽에서도 피었지 싶어졌다. 이 보다 늦게는 무등산의 평두메나 새인봉 가는 길에서도 꽃잎을 올리지 싶어진다.
겨울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노지의 야생에서 눈보라를 이기고 피어난 야생의 꽃들이야 말로 진짜 우리꽃이며 만나야 할 지구의 벗이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나는 행장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딱 2월중순부터 4월초까지는 다양한 야생화와 만나는 적기이기에 모든 일 보다 우선 순위에 꽃보러 가는 것을 맨 첫머리에 둔다.
지난 토요일 어수선한 지역의 분위기는 무작정 축선상에 대기하는 시간이었다. 구제역이 발생했으니 모든 공동체 행사는 멈춰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3월 29일부터 시작할 왕인문화축제는 당연히 뒤로 밀쳐져야 할 상황이었다. 총괄책임을 지는 입장에서 현상황이 어떤 위급함을 부르고 있고 대응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실무진과 논의하고, 주무부서와 논의를 거쳐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 집단지성의 숙의를 거치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시간이 비워지니 몸이 건질 거린다. 결국 망설이다 영암의 야생화협회장을 하셨던 분에게 전화를 건다. 이 시점에 야생화 탐사를 간다는 것이 미안한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봄마중을 하는 지역의 표징으로서 야생화 서식지를 파악해 둘 필요가 있어 간곡히 동행을 요청했다. 흔쾌히 다음날 이른 아침에 만나 산으로 향한다.
별꽃과 현호색을 찾아서
영암군 서호면과 학산면에 걸쳐있는 상은석산(해발 395M)에 별꽃과 현호색이 만개해 있을 것이라는 경험치에 의존한 산행이다. 동행자는 모두 4명, 학산의 신덕마을 등반로를 오른다. 나는 물도 스틱도 준비하지 않고 오로지 카메라 한 대와 정전가위 하나였다. 야생화를 만나러 가는 길이 산의 정상까지 갈리는 만무하고 중턱 어디쯤에 있을 터이니 꽃과 마주하고 이를 렌즈에 길어오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날씨는 냉랭했고 경사도가 비교적 높았다. 영암군의 일반적인 마을은 해발고도가 해수면과 거의 유사한 지역인지라 400여미터의 해발은 0에서 출발해 400미터를 곧장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럴 법 했다. 다른 산을 오르는 경우는 그래도 일반고도가 있는 것과 다른 것이 영암지역의 특성이다.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가니 벌써 진달래가 꽃을 피워올린것과 일촉즉발로 대기하는 것이 곳곳에 목격된다. 참꽃 진달래만 보면 화전이 그리워진다. 작년에 혼자 화전을 먹어볼 요량으로 밀가루를 사 두었는데 아직까지 개봉하지 않았으니 올해는 꼭 한번 시도해 봐야지 싶다. 진달래꽃을 보니 그 눈높이에 생강나무도 노란 꽃술을 뿜어내고 있다. 여린가지에 낭창거리며 꽃을 달고 있는 모습이 산속의 산수유를 보는 듯 반갑다.
경사도가 깊은 곳으로 오르다 보니 보춘화가 눈에 들어온다. 수그려진 몸은 눈도 땅과 마주치게하고 그 사이로 춘란의 꽃대궁이 보인 것이다. 그대로 털썩 엎드린다. 마이크로 렌즈로 접선을 한다. 난의 줄기는 고라니가 먼저 먹었는지 잘려나갔지만 분홍빛 꽃잎이 너무 선연하게 잡힌다. 마치 코브라가 머리를 낼름 거리는 듯 한 묘한 표정의 접사가 아름답다. 헐한 등산복을 입길 잘했다 싶어진다.
너덜지대에서 마주한 현호색
다시 산등성이를 따라 한참을 오른다. 바짝 마른 산에 어떤 식생도 이 계절에 복원되긴 어렵다 싶을 무렵 좌측으로 너덜겅 지대가 나타난다. 여지껏 봄철 야생화를 만난 대부분의 지역이 이런 바위들이 떨어져 나가 돌무더기를 형성한 너덜지대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제 겅중거리며 걷는다면 행여나 피어있을 꽃과는 조우하지 못하고 만다. 짐짓 경계하며 가는데 앞에 걷는 분들이 시선을 거두라 한다. 아직 좀 더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런다고 그냥 갈수는 없어 두리번 두리번 가다보니 선등자분들이 꽃 한송이에 눈을 마치고 있다. 현호색이다. 바위 부스러기와 양질의 토양이 있는 곳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이렇게 눈부신 하늘색의 꽃을 올려낸 신비로움에 나도 넋을 잃고 본다.
한시간여 동안 경사로를 걸어온 피로가 한꺼번에 휘발되고 이제 다른 자태의 현호색을 찾기 위한 탐색에 열중한다. 마치 한 마리의 미꾸라지를 발견하면 그 일대를 다 뒤졌던 유년기의 기억처럼 말이다. 그렇게 꽃과의 열애를 하다 정말 좋은 향기가 스며든다. 뭘까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길마가지나무꽃이 피었다. 담양 소쇄원 초입에서 4월초면 만났던 꽃이 여기 자연스럽게 향을 발신하는 것과 접선하게 되니 몽환적인 분위기가 된다. 가이딩을 맡은 선생님은 그 너머에 있는 서부해당화 나무를 가르켜 준다. 이름도 처음이고 나무도 처음인데 사진 이미지를 보니 꽃사과를 닮았다. 자생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말씀에 또 새로운 생명과 만나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모두들 그곳에서 꽃나무를 만나는 동안 거의 산정에 이르렀으니 정상에 가보겠다고 말씀 드리고 은적산의 최정상을 향해 올랐다. 드넓은 영암의 평야지대는 물론 영산강의 물굽이, 대불산단, 남악과 무안, 목포 일원이 눈에 들어왔다. 소사나무들이 잘 자라는 이곳의 식생 분포는 마치 해양성 기후대의 식물이 잘 분포된 지역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시 하산의 시간, 등정을 위해 찍지 못한 클로즈업의 사진을 다시 찍으며 느릿하게 하산했다.
불갑사의 야생화 군락지를 향해
그렇게 휴일의 오전을 보내고 오후는 대책회의와 향후 운영방안 등에 진력했다. 평온하지 못한 일주일을 보내며 마음은 영광군의 불갑사 야생화 군락지를 찾아 쉬고 싶은 생각 가득했다. 영암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그런 영암의 특별한 공간을 모르고 있다. 평일 늦은 오후 차를 몰아 드디어 불갑사에 이르렀다. 저수지를 왼편에 두고 첫 번째 계곡길은 반지르르했다. 이미 많은 탐사자들이 다녀간 흔적이다. 곳곳이 현호색으로 찬란하다.
변산바람꽃은 이미 져버리고, 만주바람꽃은 꽃을 열었다가 다시 오므려버렸다. 늦은 시간이니 이 친구도 잠을 자야 되겠지 싶다. 중의무릇은 아직은 이른지 그 노란 꽃잎을 열지 않고 있다. 이 또한 늦은 시간이어서 일까 다음에는 오전에 와야 되겠다는 후회가 든다. 물가쪽으로 움직이니 이번에는 노고단에서 만났던 괭이눈이 있다. 그것도 무리를 지어 있으니 황홀하다. 눈을 가까이 하고 보석함 같은 꽃술의 내부를 훔쳐 본다. 마치 금이라도 캐내려는 듯. 계속 주시하니 눈물이 핑 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야생화들과 가까이했다 멀리하며 바라보고 다시 렌즈로 투사하는 일련의 과정에 시간도 고뇌도 모두 소멸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하며 집나간 정신을 챙겨 다른 골짜기로 간다. 이번에는 노루귀와의 만남. 백색과 분홍색의 노루귀가 바위와 돌틈 사이에 쌀 한 톨 같은 크기로 보인다. 야생에서 이렇게 풍찬노숙하며 자란 꽃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행복하다. 1년여의 삶에서 땅과 가장 밀착한 시간이 바로 이즈음. 그 기운으로 어쩌면 한 해 동안을 충만하게 보내는 저력이 아닐까 라는 믿음이 생기는 날들이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