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꽃을 준비하고

[곰돌곰순의 귀촌일기] (106)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 했으니

2025-04-01     백청일, 오숙희

곰돌곰순은 한재골로 바람을 쐬러 가다 대치 마을에 매료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실 성당이랑 농협, 우체국, 파출소, 마트 등을 발견하고는 2018년 여름 이사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당에 작물도 키우고 동네 5일장(3, 8일)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으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고 있다. 지나 보내기 아까운 것들을 조금씩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서로 이야기하다 여러 사람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연재를 하게 되었다. 우리쌀 100% 담양 막걸리, 비교 불가 대치국수가 생각나시면 대치장으로 놀러 오세요 ~ 편집자주.

능주 스마트팜에서 사온 봄꽃들.

 이런 저런 일로 ‘미루다 미루다’, 결국 며칠 전 오후 시간을 내 능주 스마트팜을 찾았습니다. 곰돌곰순이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라 집에서 커피를 내려 도곡 온천 지구를 지나 지석강이 흐르는 강변 산책로에서 커피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했습니다.

 스마트팜에 들어서니 화사하면서도 은은한 향기 가득 봄꽃들이 반가이 마중 나왔습니다. 화단 여기저기에 심을 데이지·마가렛·메리골드는 포트로, 파고라에 걸어 놓을 페츄니아는 중간 크기 화분으로, 처음 보는 보라색이 아름다운 꽃은 큰 화분으로 샀습니다.

 계산하시던 사장님이, 일요일까지 추워진다는데, 영하까지 내려간다고. 잠깐 망설이다 다시 오기 어려우니 일단 사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집에 도착하니 온도가 뚝, 떨어진 게 느껴질 정도라 일단 다음 주에 날씨가 풀어지는 걸 봐서 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화분들을 방에 들여 놓아야 하는지, 뒤안에 둬야 하는지. 뒤안에 두자니 새벽에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걱정이고, 방에 두자니 꽃들이 이르게 절정이 될 거 같고. 영하로 떨어져도 뒤안은 어느 정도 바람은 막아주니 상온을 유지하겠다 싶어 일단, 뒤안에 두기로 했습니다.

 영하의 새벽과 한여름 날씨의 한낮 온도 차가 20도가 넘다 보니 아무래도 새벽과 밤중에 자꾸 뒤안의 꽃들을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한낮에는 마당으로 빼서 물을 주고 늦은 오후에 다시 뒤안으로 들여놓기는 하지만, 걱정이 좀 되었겠지요. 온실 속에 있던 꽃들이라 온도 차에 민감해서 냉해를 입기도 하니.

 따뜻했던 지난주에 심었어야 했던 걸까. 그럼, 좀 더 부지런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심겠다고 모처럼 시간을 내서 사 왔는데, 아무래도 4월에나 심어야 할까.

거름 준 며칠 후 논갈이 한 집 옆 논.

 거름을 주니, 논갈이를 하더라

 3월 초가 되면 마을 주변에 있는 농장들에서 가지치기와 거름주기를 합니다. 주변 어른들께 물어보니, 지난 가을에 가지치기를 했으면 굳이 안 해도 되는데, 할 거면 가지 끝에 물이 올라오기 전에 하라고 합니다. 늦게 하면 물이 흐르기도 한다고.

 아침 운동 길에, 산책길에 변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기도 하면서 곰돌곰순도 때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좀 더 있다가 할까, 그럴까, 하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지, 해서야 거름주기를 했습니다.

 귀촌해서 한두 해는, 땅심과 햇빛과 물만 충분하면 식물들은 자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정원수들과 텃밭 채소들을 가꾸었습니다. 인공적인 화학 제품들을 절대 쓰지 말자고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조건이어도 잎이 말라가고, 타 들어가고, 병이 들어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몇 년 동안 아무 이상 없이 쑥쑥 커가던 금송과 로즈마리가 잇달아 말라서 죽어가가도 했고.

 산속이나 울창한 숲속에서 자라는 거라면 모를까, 정원수로 들여 키우기로 했으면 애써 가꾸고 보살피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맞겠지요. 화학 제품을 쓰지 말자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식물들이 성장하는데 충분한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주말과 휴일이 지나 옆 논을 보니 논갈이가 되어 있습니다. 봄에 하니 ‘봄갈이’가 되겠지요. 논을 갈면 흙이 공기에 노출되어 미생물 분해가 빨라지고 지력이 커진다고 합니다. 마른 논이니 ‘마른논갈이’인데, 밭두둑을 짓듯이 성글게 갈았으니, ‘초벌갈이’ 또는 ‘초바닥갈이’겠네요. 두벌갈이 때는 두둑을 쪼개듯이 갈고, 논물을 가둬놓은 상태에서 하는 논갈이는 ‘세벌갈이’라고 한답니다(논갈이,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초벌갈이가 되어 있는 논을 보고 있노라니 바쁘게 움직이는 트랙터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관수정 앞 산책길에 피어 있는 봄꽃들.

 “어디에 있는가”가 아닌, “어디로 가는가”

 바둑의 위기십결(圍碁十訣) 중에 기자쟁선(棄子爭先)이 있습니다. “돌 몇 점을 잡히더라도 선수를 잡아라”라는 뜻. 사소한 손해를 보더라도 선수로 큰 곳을 두는 게 더 이득이라는 의미입니다.

 선수란, 상대방이 반드시 응수할 수밖에 없는 곳에 두는 내 수를 말하는데, 이곳을 둔 후 다른 곳을 계속 이어가게 되면 질 수 없는 바둑이 됩니다. 바둑은, 흑이 먼저 두니 선수를 잡게 되어 뒤에 두는 사람은 후수를 둘 수밖에 없어,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덤’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지요.

 기자쟁선을 모르고 바둑을 두다 보면, ‘선수’를 놓치게 되는데, 결국 상대방의 수를 따라서 둘 수밖에 없게 되어 바둑 두는 내내 ‘후수’만 두다 결국 패하게 됩니다. 보통 ‘하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

 고수들의 바둑에서는 마치 씨름의 샅바 잡기처럼, 선수를 잡기 위한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집니다. 상대방이 반드시 내가 둔 수를 이어서 따라 둘 수밖에 없게 만들려고.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프로들은 상대방의 수를 안 받는 걸 먼저 연구한다지요. 프로 바둑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 ‘손 빼기’ 하면서 선수를 잡으려는 수 싸움이 치열한 걸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인생을 바둑에 비유하곤 합니다. 여러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한데, ‘실수’라는 측면에서 바둑을 들여다볼 때, 인생에서 기자쟁선, 선수란 무엇일까요?

 바둑은, 첫수를 둘 때부터 마지막 돌을 거둘 때까지 선수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국 전체의 형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부분에만 집착해서 선수를 놓치는 실수를 합니다. 누가 실수하지 않느냐의 싸움이라 말하는 프로들도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의 수’를 놓으려 합니다.

 인생에서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조직에서, 모임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다 보면 실망하고, 상처받고, 회피하고, 침묵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의 무게에 짓눌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자꾸 눈앞에 있는 것만 보게 되고, 미래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자꾸 물러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니, 곰돌이도 똑같네요. 보통,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중요하다고 하지요. 그 격언이 지금의 나에게, 이 타이밍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무엇을 위한’ 일보후퇴였는지 망각하게 될 때가 많았으니, 결국 자기합리화가 아니었는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한데, 자신의 꿈과 열정을 잃지 않았음에도, 순간의 미혹됨에 빠져 헤맸던 거 같기도 합니다. “실수에서 배운다”라는 건 그 실수마저 자양분 삼아,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관계까지도’ 받아들여 앞으로 달려나간다는 의미가 아닐지. 그러니 인생에서 선수란, ‘꿈을 망각하지 않고 달려 나갈 수 있는 도전과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3월 꽃샘추위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하루 기온이 영하권과 무더운 여름을 오가기도 하고, 건조한 날이 계속되기도 하는, 마치 한 달 안에 사계절이 다 있는 종잡을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침 산책길에 보는 관수정 앞의 개나리, 진달래, 매화, 동백은 어떤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자신이 할 일을 결코 미루지 않고, 기어이 꽃을 피워냈네요.

 ‘꽃샘추위’라는 이름으로 ‘봄’을 위협해도, 결코, 다가오는 봄을 이길 수 없지요. 그러니 3월을, 1년 열두 달을 보면 “주춧돌”에 해당된다고 하는가 봅니다. 1, 2월 ‘구상하기’, ‘설계도 그리기’를 완성한 후, 본격적으로 터를 닦으면서 기둥을 세울 수 있는 주춧돌 만드는 시기.

 자연은 늘 자신의 리듬으로 결코 ‘선수’를 잃지 않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지만, 실수가 많은 인간은 늘 그렇지는 못하겠지요. 그럼에도 귀촌생활은, 세상의 리듬 속에 조바심이 일면서도, 자연의 리듬 속에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 늘 그랬듯이 기대와 설레임을 가득 채워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를 착점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두어야 하는 바둑처럼,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거처럼.

 곰돌 백청일(논술학원장)·곰순 오숙희(전북과학대학교 간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