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14) 야산에 묻혀 있는 청백리 정자산(鄭子産) 2

그의 정치적 위상 커지자 그의 나라 국력도 달라져

2025-04-02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정자산의 초상화.

 자산의 생애 연표에서 보다시피 자산은 20세 전후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30세 무렵 귀족의 최고 신분인 경(卿)이 되었다. 군주도 이 경 집안에서 나온다.

 자산은 국제적으로 큰 혼란과 개혁의 와중에서, 그것도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가장 고귀한 신분이긴 했지만 나라의 처지는 고단했다. 그의 눈에는 당장 정나라의 존망이 어른거렸다. 나라를 존속시키려면 무엇이 정말 필요한가에 일찍 눈을 떴다. 약관 20세부터 정계에 뛰어들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정치에 몸을 담았고, 후반 20년은 정나라의 정치와 정책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상국(相國, 재상)을 지냈다.

 자산의 60년 생애 동안 정나라 국군은 세 사람이 바뀌었다. 세 명의 국군이 바뀐 만큼 정국이 불안했다. 기원전 571년, 자산의 나이 12살 때 성공(成公)이 죽고 이공(釐公)이 즉위했고, 자신이 18세 때 권신 자사가 이공을 죽이고 간공(簡公)을 세웠다. 간공은 비교적 오래 재위하여 자산의 국정 운영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했다. 간공 다음은 정공(定公)인데 자산의 만년이었다. 정확하게 네 명의 국군을 겪었다.

 자산의 나이 19세 때 공실 내부에 정쟁이 벌어져 자사가 여러 공자들을 죽였다. 이 때 자산은 아버지 자국에게 공실 내부가 어지러워지면 나라가 흔들린다고 경고했다. 아버지 신변도 조심하라고 했다. 아버지 자국은 19살짜리가 뭘 안다고 끼어드냐며 자산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기원전 563년, 자산의 나이 20세 때 아버지 자국이 정쟁의 와중에 피살당한다. 자산의 경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정나라 정치판을 꿰뚫어 본 스무 살 자산의 안목이 이랬다. 자산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피살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빠르게 수습함으로써 정치력을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정나라 정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정치와 외교에서 능력을 입증한 자산

 자산은 20세 약관 때부터 이미 정치력을 입증했다. 이러한 능력은 정치뿐만 아니라 정책과 외교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먼저 외교력을 살펴보자. 자산의 나이 34세 때인 기원전 549년 북방의 강대국 진(晉)을 방문했다. 당시 진나라는 패권국이었다.

 자산의 진나라 방문 목적은 패권국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양에 대한 협상이었다. 환공 이래로 패권국들은 다른 중소 제후국들에게 일정한 식량과 물자 및 인력을 요구했다. 주 왕실을 받드는데 필요한 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존왕양이(尊王攘夷)’라 한다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외적의 침략이나 다른 제후국들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명목이었다. 당시 이 분담금 때문에 약소국은 등골이 휘었던 모양이다. 특히 약한 정나라는 이 부담이 더 했다.

 자산은 이 만만치 않은 일을 지고 진나라를 방문했고, 공물의 양을 대폭 줄이는 큰 성과를 내고 돌아왔다. 당시 자산은 풍부하고 깊은 지식과 인품으로 상대를 설득했다. 때로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따지며 진나라를 밀어붙였다. 자산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가 ‘박물군자(博物君子)’다. ‘세상 물정을 두루 아는 군자’란 뜻에 어울리게 그는 군자의 인품에 해박한 식견으로 협상에 임하여 상대를 승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산은 당시 국제 정세를 면밀히 분석해서 북방의 진나라가 패권을 계속 지키려면 정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즉, 남방의 초나라, 서방의 진나라, 동방의 제나라 그리고 북방의 진나라 그 사이에 위치한 나라가 정나라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극대화한 것이다. 누구든 정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패권국이 될 수 있는 현실을 조목조목 이해시켰다. 그러려면 정나라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대가 안정되어 있어야 하고, 그 안정을 해치는 과도한 공물의 양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외교무대에서 지금까지 큰 부담이 되었던 공물의 양을 줄이는 큰 성과를 갖고 돌아온 자산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자산의 나이 39세 때 정나라를 방문한 오나라의 명망가 계찰(季札)은 자산의 집권을 예언했는데, 이는 자산의 입지와 명성이 국제적으로 커졌음을 의미하는 일례였다.

형서를 주조한 솥을 `형정(刑鼎)’이라 한다. 이로써 형정은 개혁과 개혁정책의 상징물이 되었다.

 집권과 개혁

 기원전 543년 40이 넘으면서 자산은 정나라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상국이 되었다. 집권하자 자산은 바로 전면 개혁에 돌입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정치적 이상을 실제 정책과 실질적인 권력을 통해 실현할 시간이 찾아왔다. 그의 개혁정책을 알아보기에 앞서 북방의 강국 진나라를 다시 방문한 일부터 살펴보자.

 집정 약 1년 뒤인 기원전 542년, 자산은 많은 공물을 싣고 진나라를 방문한다. 자신의 집권을 알리는 한편 강대국 진으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 손님을 맞이하는 진나라의 영빈관의 뜰이 비좁아 공물을 실은 마차가 다 들어갈 수 없었다. 자칫 힘들게 가져온 공물들이 비라도 맞으면 다 상할 판이었다. 자산은 수행원들에게 영빈관 담장을 헐게 하고는 마차들을 들였다.

 남의 나라, 그것도 강대국 영빈관 담장을 허문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고가 올라갔고, 담당 고위 관리가 와서는 무례를 꾸짖었다. 자산은 태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따졌다. 그 옛날 문공 때는 영빈관의 뜰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그런데 지금 영빈관은 공물을 실은 수레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좁다. 공물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찌 되나? 큰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잖은가?

 이 이야기를 보고 받은 진나라 평공은 결례를 사과하고 영빈관을 넓히라고 명령했다. 34세 첫 방문 후 7년 만에 정나라의 국가적 위상이 이렇게 커져 있었다. 다시 말해 자산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커졌고, 그것이 정책을 통해 성과를 냄으로써 정나라의 국력이 몰라보고 달라졌다. 자산의 집권 “1년 만에 나라가 안정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내부적으로 자산의 개혁정책은 철저하게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백성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공실을 비롯한 귀족들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 자산은 말 많고 탈 많던 공실과 귀족들의 다툼을 적극 중재함으로써 조정과 지배층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부담을 대폭 줄이는 조세 제도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에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자산의 개혁정책의 백미는 47세, 집권 8년차에 단행한 ‘형서(刑書)의 공포(公布)’다. ‘형서의 공포’가 무엇인가? 형서는 법률조항을 말한다. 당시 법률조항이 형법 위주였기 때문에 형서라 했다. 자산은 이 법률조항을 청동 솥에 주조한 다음 궁궐과 관청 문 앞에 세우게 했다. 법률조항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한 것이다. 이는 중국 역사상 빠지지 않고 기록되는 중대 사건이었다.

 법률조항은 물론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다만 공포를 안 했을 뿐이다. 귀족들만 알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자산은 이를 모두에게 알렸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다. 법률조항에는 백성들의 몸과 재산을 지켜주는 조항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로이 백성들의 재산과 신체를 침해해도 벌을 받지 않았던 기득권으로서는 박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극렬하게 반대하고 저항했다. 심지어 강대국 진나라의 귀족인 숙향(叔向)은 편지까지 보내 그러다가 제명에 못 죽는다고 경고까지 했다. 이에 자산은 “나는 그런 거청한 논리는 모른다. 나는 그저 세상을 구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구세(救世)’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조차 격하게 반대했던 법률의 공포는 이후 반세기가 채 되지 않아 모든 나라가 다 따라 했다. 개혁의 첫걸음이 다름 아닌 법률의 정비와 공포라는 사실을 다 인정한 것이다. 자산은 이를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고, 또 이를 실행했을 뿐이다.

 김영수 (사)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