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야산에 묻혀 있는 정자산(鄭子産) 3

소통하고 민심 읽어 정책 통해 뒷받침

2025-04-16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정자산의 초상화(김농의 그림)

 국정을 맡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백성들이 가장 요구하는 정책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다시 말해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나라의 미래, 백성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이를 위해 멸사봉공할 수 있는 정치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기득권을 흔쾌히 내려놓을 수 자기희생의 자세가 따라야 한다. 권력과 부를 다 가진 기득권 세력들이 정치와 정책을 이끌던 시절에 정책의 성공은 다수를 위해 기득권을 얼마나 양보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이는 지금도 하나 다르지 않다. 모든 개혁은 기득권의 재조정이자, 이익의 재분배다. 대의를 위해 기득권과 이익의 조정에 동의하느냐,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개혁에 저항하느냐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정책을 주도하는 사람이 기꺼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청백리 자산의 정치 철학

 자산은 이런 자세로 무장한 고귀한 보수였다. 그는 정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백성들의 적극성을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층을 포함한 다수의 민심과 소통해야 했다. 아울러 기득권을 재조정해야만 했다. 당연히 반대가 따랐다. 자산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허구한 날 향교(鄕校)에 모여 자산을 비난하고 심지어 자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다. 자산의 측근이 이참에 향교를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자산의 답은 이랬다.

 “왜 향교를 없애자는 건가? 조만간 그곳에 모여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장단점을 논의할 것이다. 그들이 칭찬하는 점은 계속 유지하고 비판하는 점은 고치면 될 터이니 우리의 스승이 될 것이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비난을 들으면 그것을 서둘러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여 어찌해볼 수 없다.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느니만 못하다. 향교를 남겨두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소통하고 민심을 읽었으면 정책을 통해 뒷받침해야 한다. 이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자산은 말한 바와 같이 법률을 공포하고 세금제도를 개선하는 등 본격적인 개혁정책으로 백성들의 이익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적극성을 끌어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정책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인들과 신사협정을 맺은 일이다.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최초일 것이다.

 정나라는 몇 차례 언급했듯이 천하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나라다. 사통팔달이다. 따라서 천하의 상인들이 다 오가는 곳이다. 상인의 역할이 정나라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고 중요했다. 상인은 지배층이 결코 아니었다. 춘추시대 초기까지 상인은 관청을 일을 받아서 먹고 살았다.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인(工人)들과 마찬가지였다. 이를 ‘공상식관(工商食官)’이라 했다.

 그러나 춘추 후기로 넘어가면서 각국은 개혁에 돌입했고, 그에 따라 상인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관청에 매이지 않은 자유상인이 등장했고, 규모에 따라 거상(巨商)들도 출현했다. 상인이 천하를 다니며 개혁에 따른 각종 물자를 공급하지 않으면 개혁 자체가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작은 정나라는 상인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컸다.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 자산은 상인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상인의 활동에 나라는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 대신 상인들은 일정한 세금을 낸다. 이 뿐이었다. 상업 활동에 필요하고 상인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적 조치는 나라가 알아서 뒷받침했다. 이로써 정나라 상인들은 천하를 자유롭게 다니며 나라를 위해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각국에서 입수한 유용한 정보를 가져다 날랐다.

 자산의 정치와 정책이 돋보이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도덕성과 청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담보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정치와 정책이 있어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으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즉, 사리사욕이 개입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 갈 수 없다. 모든 정치와 정책이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작은 나라를 이끄는 통치자와 고위 공직자는 더 청렴해야 한다. 그래야 큰 나라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상대할 수 있다. 자산은 이런 점에서 모든 고위 공직자의 표본이다. 이 점은 다시 언급될 것이다.

 자산의 정치철학과 그가 시행한 정책은 ‘제 때(Right Time), 정확한 방향((Right Message), 그 사람((Right Person)’이 어우러진 완벽에 가까운 모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정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청백리 자산의 정치와 정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고 그 울림이 여간 깊지 않다.

자산에 대해 다양한 평을 남긴 공자는 자산과 자산의 정치를 높이 평가했다.

 청백리 자산에 대한 역대 평가

 자산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들어 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른 측면에서 알아보자. 자산은 정치는 ‘너그러움’과 ‘사나움’을 섞어가며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관맹상제(寬猛相濟)’라 한다. 먼저 자산의 말을 들어보자.

 “정치는 두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로 백성들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물과 불을 가지고 비유하면 적절할 것이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들은 겁을 먹는다. 따라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아주 적다.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백성들이 겁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관대한 통치술이란 물과 같아 효과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엄격한 정치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공자는 자산에 대해 비교적 많은 평을 남겼다. 먼저 “고인의 유풍을 이어받아 백성을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했고, 향교 폐지에 반대한 자산에 대해서는 “자산더러 어질지 않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리고 자산의 ‘관맹상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하면 백성들이 게을러져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면 상처를 면키 어려워 다시 관대로 돌아간다. 따라서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여 서로 보완작용을 하도록 해야만 정책이 통하고 인화를 이룰 수 있다.”

 다음은 자산이 집권하여 이런저런 정책을 시행한 5년차에 대한 평가로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어린 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되었다. 2년째가 되자 시장에서 물건 값을 에누리하는 일이 없어졌다. 3년이 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 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다.(또는 군대에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해서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들 입었다.”

 5년 만에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안정시켰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명나라 때 의학자 왕대륜(王大綸)은 아주 간결하게 ‘춘추일인(春秋一人)’이라고 했다. 춘추시대를 통해 자산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뜻의 극찬이다. 춘추시대 기록인 《좌전》을 보면 전반부의 주인공은 관중이고, 후반부는 자산이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의 비중이 컸다.

 자산이 죽은 뒤 정권을 맡은 자태숙은 “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골치는 없었을 것인데”라고 한숨을 쉰 바 있다. 자산이 ‘관맹상제’로 정치하라는 충고를 듣지 않고 너그러운 정치로 일관하다가 국정에 큰 혼란을 초래한 다음 후회하며 한 말이다.

 자산의 집권을 예견한 오나라 계찰은 “정나라의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 밖에 없소이다”라고 했다. 자산에게 정권을 맡긴 자피는 자산을 죽이려고 하는 기득권 귀족들에게 “예를 갖춘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환란은 없다”고 경고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 자산을 직접 만난 진나라 국군 평공은 ‘박물군자(博物君子)’라고 칭찬했다. 세상물정의 이치를 두루 통찰했던 군자라는 평가였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