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커스] 21대 대선 ⓹김문수의 ‘진지전’(陣地戰)
‘윤석열 내란’ 끊지 못해 아수라장 된 국힘의 ‘정치 쿠데타’
# 국민의힘 대선후보 선출 막장극이 전대미문의 파국으로 치닫다 평당원들에 의해 가까스로 종료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이준석 대표가 없는 날 슬그머니 당사에 들러 입당하더니 한덕수 전 총리는 모두가 잠든 주말 새벽을 기해 전격적으로 입당 원서를 내밀고는 24시간도 안돼 불명예 퇴장을 하게됐다.
한밤의 '정치 쿠데타'로 후보 지위를 뺐겼던 김문수는 중앙선관위 등록 마감 하루 전, 극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친윤 지도부가 이끌던 당은 이미 사분오열 만신창이 상태로 이를 수습할 책임이 그의 어깨에 주어졌다. 한동훈 홍준표 제거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던 주류의 시나리오가 이처럼 아수라장으로 급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 전 총리는 정치를 너무 쉽게 봤다. 유학 생활 몇 년보다 단 한 달이라도 그 나라에서 장사를 해본 사람이 현지인 속내를 훨씬 잘 안다. 당연한 일이다. 외국인들이, 돈 쓰는 유학생과 비즈니스 경쟁자를 똑같이 대해줄 이유는 없다.
행정과 정치는 별도의 영역이다. 한 전 총리가 그간 어깨너머로 구경한 정치도 실전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그의 정치 입문기는 김문수 후보 말마따나 세계 정치사에 전무한 일이었다. 아마도 후무(後無)할 가능성도 높다.
왕초보이다 보니 정치적 감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이다. 5.18 묘역 앞에서 외친 ‘저도 호남사람’이라는 발언은 그 중에서도 수준 이하의 백미(白眉)였다. 광주 시민들이 언제 타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참배를 막은 적이 있나? 한 후보의 발언은 ‘이완용도 조선사람’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한 전 총리는 관료 생활 50여 년 동안 업무나 출장 과정에서 국민 세금 외엔 웬만해선 사비를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의 세계가 꼭 그렇게 돌아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고 건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총장이 대권 후보로 며칠 돌아다니다 포기한 배경에도 비용 문제가 있었다.
무소속 후보로는 단 하루도 활동하지 않겠다는 한 전 총리의 ‘비장한’ 선언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내 돈은 한 푼 안 쓰고 불과 얼마 전까지 집권당이었던 대한민국 제 2당의 대통령 후보를 차지하겠다는 공짜심리와 한탕심리. 도대체 이런 철두철미 알뜰한 분을 누가 이 지경까지 끌고 왔는지 궁금하다.
# 상당수 국힘 의원들은 ‘김-한 단일화’가 이뤄져도 이재명 대세론을 흔들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굳이 한 전 총리에게 후보 자리를 내주려 필사적이었던 것일까.
정치권에선 무엇보다 ‘차기 당권’을 그 이유로 꼽는다. 만약 한동훈이나 홍준표같은 캐릭터가 대선 이후 고분고분 물러나지 않고 전직 대통령 후보 지위를 이용, '당직 알박기'라도 시도할 경우 내년 지방선거와 이후 총선까지 당권을 쥐고 가려는 그들의 계획이 흐트러진다.
공천 곧 당선인 강남과 영남, 즉 '양남 지역' 중심의 국힘 의원들은 현 체제가 흔들리는 것 자체를 본능적으로 꺼린다.
김근식 국민의힘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도 같은 지적을 했다. “친윤 세력은 나라가 거덜 나든 이재명이 당선 되든 본인들의 기득권만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 안 듣는 후보들 대신 어리버리한 김문수를 세워 당 밖에 말 잘 듣는 한덕수로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폭로’도 같은 맥락이다. “용산과 당 지도부는 김문수가 만만하니 한덕수의 장애가 되는 홍준표는 떨어뜨리자는 공작을 꾸몄다.” 그 ‘어리버리’ 김문수가 막판에 반기를 들었으니 친윤 주류가 느꼈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 윤석열 권영세 권성동 한덕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맞다. 젊은 시절 고시에 합격, 고위 관료와 법조 엘리트로 생활하다 정치판에 불려온 사람들이다.
본인들이 도서관에서 법전이나 행정학 책을 뒤적일 때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감옥으로 끌려가던 학우들의 고뇌와 결단이 얼마나 이해됐을까? 심지어 강의실을 떠나 노동자와 농민들 곁으로 갔던 친구들의 행보는 필경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을 가능성이 크다.
공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본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민주화 운동을 하거나 시민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데모만 하던 무능한 X들’일 수 있다.
그래서 김문수의 최근 언행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료 사회의 ‘상명하복’이 몸에 밴 입장에선 더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은 ‘서노련’(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이었던 김문수와 운동권 출신 측근인 차명진 박계동 등을 심하게 ‘띄엄띄엄’ 봤던 것이다.
김문수는 부당함과 모욕감을 느끼면 박정희든 전두환이든 윤석열이든 자신의 한쪽 팔을 내주고 상대방 급소를 향해 돌진하는 ‘운동권 곤조(근성)’가 있다. 권영세나 권성동 한덕수 등 가급적 본인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그룹에겐 이해 불가능한, 도저(到底)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동지 심상정의 소재를 불지 않던 김문수와 뺨 두어 대만 맞아도 기가 죽어버릴 이른바 ‘책상물림’들. 이들의 정서 차이가 이번 이전투구 단일화 파동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아, 수사기관 고문이 근절된 배경에도 운동권들의 숱한 희생이 깔려있다.
#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이번 대선은 국민의힘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운동장이다. 전가의 보도였던 ‘반 이재명’만으론 한계가 있는 선거이기도 하다.
구 여권으로선 ‘국민의힘을 심판하자’는 기본 구도를 반드시 다른 프레임으로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이슈가 개헌과 차기 대통령 임기 단축이고 이를 위해 반 이재명 세력이 모두 가세한 단일화 토너먼트가 절실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감동은 사라졌고 빅텐트는 찢어졌다. 선대위 참여 대신 차기 전대를 겨냥하거나 당 지도부에 독설을 퍼붓고 아예 출국하는 모습만 눈에 띈다. 당 밖의 새미래 이낙연 상임고문은 선거 불참을 선언했고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차제에 보수의 대표성을 노린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1970년대 신민당의 ‘각목 전당대회’를 거론하며 “각목만 안 들었지, 당권 찬탈전은 그때랑 같다”고 자탄한다. 누구 탓할 것 없다. 겨우내 탄핵 반대를 외치며 아스팔트 극우 세력에 기대 근근이 연명해 온 국민의힘의 업보다.
PS : 온라인 댓글 하나. “윤산군(尹山君)의 세자 책봉을 놓고 공조판서 김문수와 영의정 한덕수의 당파싸움이 접입가경에 이르렀으니 김가네는 세자 책봉을 윤허하는 교지를 내리라고 상소를 올렸고 한가네는 폐세자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를 결정해야 할 윤산군은 폐주가 돼 한강나루에서 강아지와 산보나 하고 있었다 – 윤산군 일기 중”
김대원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