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드리운 연보랏빛 꽃송이 바람에 흩날려
[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74) 물길따라 보랏빛 향기, 멀구슬나무 ‘멀다’와 구슬 같은 열매 달려 붙여진 이름
봄이 깊어질 무렵, 장록국가습지를 따라 걷는 길은 언제나 특별하다. 하천을 따라 은은히 퍼지는 보랏빛 향기, 그 향기의 주인공은 바로 멀구슬나무다. 가지를 드리운 연보랏빛 꽃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릴 때면, 그 아래 조용히 흐르는 물살마저도 꽃잎을 조심스레 실어 나르는 듯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습지센터 예정지에 대한 주민설명회가 끝난 어느 저녁, 현장답사를 겸한 산책길에서 그 향기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문득, 그 오랜 시간 지탱해주었던 이곳의 기억을 되짚게 되었다. 대학원 시절의 대부분을 장록습지를 바라보며 보냈다. 아이들은 어렸고, 과제는 산더미였으며, 야외 조사는 왜 그리도 잦았던지.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곤 했지만, 연구실 9층 창밖으로 보이던 습지의 푸르름은 늘 위로가 되었다. 도시 안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온전한 자연이었고,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풀잎과 철새 떼의 비행은, 마치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끝내 졸업이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야 멀구슬나무의 보랏빛향기가 가득한 장록국가습지에 그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한다.
멀구슬나무는 ‘멀다’와 구슬 같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예전에는 ‘멀다’라는 말이 단순한 거리 개념을 넘어서 ‘자주 볼 수 없는’, ‘드문’의 의미로도 사용하였다. 산기슭이나 마을 외곽, 들판 가장자리 등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곳에 자라는 경우가 많아 쉽게 볼 수 없는 나무라는 의미에서 ‘멀’이라는 접두어가 붙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민가 주변에 야생화되어 자생종인지 도입종인지 명확하지가 않다는 보고도 있으며 전라도와 제주도 일대에서는 구주나무, 구주목, 말구슬나무라고도 부른다. 기후변화지표종이며,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 3등급으로 북방계나 남방계 식물이 2개의 아구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난온대 식물이다.
생태적 특징은 멀구슬나무과로 마을 민가 부근에 식재하거나 야생화되어 높이 15m 정도로 자라는 낙엽 활엽 큰키나무이다. 나무껍질은 세로로 잘게 갈라지며 어두운 갈색이다. 잎은 2회 우상복엽이고 어긋나게 달린다. 작은 잎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거나 깊이 파여 들어간 결각상이다. 잎자루는 길고 기부가 굵다. 꽃은 5월에 연한 자주색으로 피는데 가지 끝 잎겨드랑이에 원추꽃차례로 달린다.
열매는 9월에 황갈색으로 익으며 겨울에도 달려 있다. 특히 가을의 황색 열매는 새들이 좋아하며 노랗게 가지 끝에 달리는 노란 열매가 아름답다. 우리나라 전남, 경남, 제주도 등에 나며 일본, 타이완, 중국, 네팔, 인도, 히말라야, 태평양 도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등지에 분포한다. 원산지는 말레이반도이다. 공해에 강하여 정원수 및 가로수로 심는다.
오늘날 멀구슬나무는 도심 가까운 곳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으며, 장록국가습지 일대에서도 꽃을 피우며 사람들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있다. 이 나무는 황갈색 구슬 같은 열매를 맺고, 공해에도 강해 도심 속 생물다양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생태적 가치가 풍부한 장록국가습지는 2020년, 대한민국 최초의 도심 국가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들어설 ‘장록국가습지센터’의 설계가 진행 중이다. 전시 공간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 생태문명의 전환을 이끄는 교육과 참여의 거점이 되어야 할 이 센터는 2027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행정 주도의 습지센터는 전시 콘텐츠의 노후화, 생태학적 전문성 부족, 예산 부족, 시민 참여 구조의 부재 등 여러 한계에 부딪혀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선진 사례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홍콩의 마이포 습지센터는 아시아권에서 가장 성공적인 거버넌스형 모델로 손꼽힌다.
WWF 홍콩이 운영하는 마이포는 생물다양성 모니터링, 맞춤형 환경교육, 지역주민 고용과 교육을 아우르는 지속가능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해설사 동행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한다. 이러한 원칙과 시스템은 장록국가 습지센터의 향후 운영 방향에도 깊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장록국가습지센터는 단순한 생태 전시관을 넘어야 한다. 첫째,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이 지역의 생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정밀 모니터링 체계와 시민 참여형 조사 시스템이 필요하다. 둘째, 탐방 인프라를 설계할 때는 생태적 민감성과 계절적 변화에 대한 고려가 전제되어야 한다. 셋째, 지역주민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닌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자원봉사자 활동, 생태 해설사 양성, 지역 일자리 연계 등을 통해 거버넌스형 운영모델을 정착시켜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장록국가습지를 따라 흐르는 물길 위로 퍼지는 멀구슬나무의 보랏빛향기는 그곳이 지닌 생태적 가능성과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미래를 일깨운다. 이제는 그 향기를 단지 스쳐 지나가지 않고, 기록하고 가꾸고 보전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장록국가 습지센터가 광주의 기후위기대응과 생물다양성 보전의 거점 역할을 하는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글·사진=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