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수리 전문가 이빙(李氷)

대형 국책사업으로 천하통일 이바지

2025-06-18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도강언의 현재 모습이다.

 중국 도교의 여러 신들 중 청원묘도진군(淸源妙道眞君)이 있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이 신은 세상사 온갖 일들을 주관하는데, 특히 하천을 주관하며 백성에게 큰 혜택을 준 물의 신이다. 역대로 민간은 물론 나라에서도 곳곳에 도관을 세워 모셔왔다.

 청원묘도진군은 많은 별칭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랑신(二○神)’ 또는 ‘관구신(灌口神)’이란 별칭이 눈길을 끈다. 이 이름은 역사상 대규모 수리사업을 이끌었던 실존 인물과 관련이 있다. 특히 이 인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 즉 최초의 대규모 수리공정을 완성한 청백리로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다만 청백리로서 그의 행적은 기록이 부족하다. 이는 그가 이룬 수리사업의 성과가 워낙 대단하여 대부분의 행적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이룬 성과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천하통일의 밑천은 농업 생산력

 중국 역사성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방의 낙후된 변방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그런데 이 막강한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밑천은 경제였고, 경제 중에서도 농업 생산력이 가장 핵심이었다.

 전국시기에 들어와 진나라는 범수(范○)가 제안한 ‘멀리 있는 나라와는 잘 지내고, 가까운 나라는 공략’하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외교책략을 기조로 장의(張儀)가 제시한 연횡책(連橫策)으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각개 격파해나갔다. 6국 중 원교의 대상은 동방의 제나라와 남방의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원교의 대상이었지만 지리적으로 제나라보다는 훨씬 가까워 언제든 충돌의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진나라는 초나라에 대해 강온책을 함께 구사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금의 사천성 지역의 촉군(蜀郡)이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연히 초나라를 공략하기 위한 군대의 역량이 중요했고, 이 군대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의 확보 또한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는 남북 두 곳에서 대형 수리사업을 진행하여 남방과 중원의 식량 확보에 성공했다. 그 중 남쪽의 수리사업을 ‘도강언(都江堰)’, 북방 중원의 수리사업을 ‘정국거(鄭國渠)’라 불렀다. 시기는 도강언 사업이 정국거 사업에 비해 약 50년 이상 앞섰다. 도강언 수리사업을 책임진 사람은 이 글의 주인공인 이빙(생몰미상)이었다.

수도 함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정국거는 진왕 정(훗날 진시황) 시기에 개착된 수리시설.

 촉군의 개발과 이빙의 도강언

 이빙은 전국시대의 수리 전문가다. 기록의 부족으로 그가 태어나고 죽은 연도를 알 수 없다. 흩어져 있는 엉성한 기록과 민간전설 등을 참고하여 그의 행적을 재구성해보면 대체로 이렇다.

 전국시기 진나라는 상앙(商○· 기원전 약 390~기원전 338)의 변법개혁을 통해 국력을 크게 키웠다. 기원전 316년 혜문왕은 촉나라를 멸망시켰다. 촉은 진의 군이 되었다. 이로써 진은 천하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섰고, 이 지역의 특성과 이점을 살려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일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촉군을 상황을 보면, 민강(岷江)의 수재(水災)가 매우 심각했다. 특히 여름과 가을의 홍수는 재앙 그 자체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과 밭 그리고 집이 물에 잠김으로써 백성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빙이 촉군의 군수로 부임했다.(그가 언제 촉군의 군수로 임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대략 소왕 51년인 기원전 256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부임한 이빙은 자신의 눈으로 이 지역의 수재를 직접 목격했고, 백성의 절박한 호소를 무수히 들을 수 있었다. 이빙은 수재를 수리(水利)로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사업은 촉군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는 관건이 될 뿐만 아니라 촉군에 대한 통치를 다지는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빙은 당연히 민강에 주목했다.

 일찍이 촉군의 백성은 민강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옥루산(玉壘山)을 뚫어 ‘보병구(寶甁口)’라는 길목을 내어서 민강의 물을 동쪽으로 흐르게 했다. 그러나 공사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강 서쪽의 수재와 강 동쪽의 가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수재 발생의 근본적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이빙은 수리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함께 민강 양안을 상세히 살펴 마침내 수재의 원인을 알아냈다.

 민강은 원래 촉군 북부 높은 산 위에서 급하게 관현 일대로 흘러내린다. 그러다 갑자기 평평한 하천으로 들어서면 그 흐름이 급격하게 느려진다. 이 때문에서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흙이 쌓여서 하천 바닥이 막혔다. 이빙은 수재의 원인을 밝히고 백성의 의견을 청취한 위에 앞서 민강의 치수사업에 따른 교훈을 받아들여 중류에 보를 만드는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보병구 상류의 민강 중심에다 물길을 나누는 보를 쌓아서 민강의 강물이 이곳에서 두 길로 갈라져 흐르게 했다. 보의 서쪽 한 갈래는 민강을 따라 바로 남쪽으로 흐르고, 보 동쪽의 한 갈래는 보병구를 지나는 관개용수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넘치는 홍수를 나누고 동시에 관개라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옳은 방법이었지만 단순한 철제 공구와 돌·흙에만 의존해야 하는 당시 조건에서는 강의 중간에다 순조롭게 흐르는 보를 쌓고, 특히 강물을 둘로 나누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물길을 나누기 위한 보를 쌓는 데 사용된 죽건(아래)과 급류를 막기 위한 마차(나무로 만든 삼각대 모양의 차단시설) 구조물(위)의 모습이다.

 험난한 공정

 공정은 시작되었지만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쳤다. 그러자 누군가 강변의 많은 둥근 돌을 강 중심의 돌로 형성된 돌섬으로 옮겨 상류에서 쏟아 부어 물길을 나누는 보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돌로 만든 보도 비가 많이 내리면 쓸려내려 간다는 것이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나? 이빙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끝내 방법을 생각해냈다.

 사천성 지역에는 대나무가 많이 난다. 당지 사람들은 집안의 가구나 그릇 따위를 모두 대나무로 만든다. 그리고 산의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쳐 놓은 죽롱(竹籠, 대광주리)을 흔히 볼 수 있다. 광주리 안에 씻을 물건 따위를 넣어 흐르는 물에 담가 놓는다. 이를 본 이빙은 대나무 큰 광주를 짜서 그 안에 둥근 돌을 넣어 보를 쌓았다. 돌들이 한데 큰 대광주리에 담겨 있고, 이것들을 엮어서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물살에는 쉽게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 이를 층층이 쌓아 올리면 튼튼한 보가 된다. 이를 죽건(竹楗, 대나무 방죽)이라 했다. 이빙은 이렇게 쌓은 보를 보호하기 위해 돌섬 양옆에 큰 돌들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물길을 나누는 튼튼한 보가 완성되었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