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손님들과 남도를 걷다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공간서 장소로, 기억서 이야기로
작년 강릉의 율곡연구원에 발표를 하러 갔었다. 오죽헌을 가지고 있는 강릉에서 담양 소쇄원의 체험 프로그램 사례가 궁금해 불렀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바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간을 조성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인문지리적 특징이 융합되며 공간이라는 한정된 구역이 장소로서의 의미망을 갖는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강진이나 해남, 영암 같은 곳은 역사 유적들이 산개한 곳이다. 여기에 강진을 특정하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남도 답사 1번지라고 명명했다. 산개한 유적이 마치 한덩어리로 보이며 청자도요지와 다산초당과 백련사와 무위사, 병영성 등이 강진 한정식과 더불어 풀 세트로 장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곳이 장소로서의 의미망을 획득하게 하려 사력을 다하는 것이 이즈음의 현실이고 율곡연구원의 과제 또한 그러했다.
답사 요청, 다시 영암으로
어쨌든 발표를 잘 마치고 바람처럼 영암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연구원의 담당자분께서 나중에 호남에 내려가면 길라잡이를 좀 해주실 수 있느냐고 여쭤왔다. 이 먼길을 오신다는데 당연히 제가 나서겠노라 약속 드렸다. 그리고 1년이 다가올 무렵 전화가 왔다. 소쇄원을 시작점으로 해서 영암과 강진, 해남 등의 유교 유산을 답사하시겠다는 것이다. 20여명이 참여한다고 하니, 숙소와 식사, 순례코스 등을 부탁했다.
최근 영암문화관광재단에서 새롭게 오픈 한 구림한옥스테이라는 전통숙박시설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그럼 잠은 영암에서 주무시고 함께 움직이시자고 의견을 드렸다. 그렇게 지난 금요일 연구원의 관계자분들이 담양을 거쳐 영암에 오시고, 나는 다음날 아침 식사 일정부터 합류했다. 우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구림 마을의 회사정이었다. 1565년 구림 마을의 대동계가 성립이 되어 향촌의 자치규약으로 공동체의 결집과 비전을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있다. 총 43명의 계원들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사람들이니 오늘 말로 치자면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주민 자치센터와 같은 것이었다. 동계의 모임처로 사용된 회사정을 설명하며, 정자의 기능에 더해 마을의 재판소 같은 역할까지 담당해던 이야기로 이어갔다.
정여립과 송강 정철, 묻기 어려운 역사
그런데 불쑥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질문이 들어왔다. 관동별곡의 고장 강릉답게 송강 정철에 대한 그분들의 인식 태도와 전라도에서의 평가에 대한 간극과 한편으로 이곳 구림마을처럼 대동계를 운영했던 정여립이 오버랩되며 궁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 전라도 일원을 피로 물들인 정여립과 정개청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호남을 배역의 땅이라 여기며 왕조의 강한 부정이 이 땅을 갈라놓게 했던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진안의 죽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송강 정철이 오늘날로 치면 특검을 수행하는 위관이 되어 모진 형벌과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한 인원이 물경 천여명에 이르렀다는 사실. 이로인해 몇몇 가계에서 칼질을 할 때 철철철 하거나 송강송강 썰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오며 커다란 반목으로 자리했지만 금기어처럼 귓속말로 이어져야 했던 그런 이야기를 편견을 갖지 않고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난감했다.
이런 질문을 일상으로 받는 해설사 선생님들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지 몸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구림마을의 태동과 관련한 도선국사와 국사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처음으로 유약을 사용한 시유도기가 탄생한 가마터와 대동계의 시대, 임구령의 간척시대,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을 겪어 오던 시절, 불멸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이 마을의 현덕승과 주고받은 서한에서 약무호남이면 시무국가 라는 말을 처음으로 상용했기에 더한 자부심을 갖는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도갑사에서 만난 전통과 파격
도갑사, 늘 편안하게 이르는 절집이지만 안내를 하며 가는 길을 또 다르다. 일주문과 쌍홍교를 지나 해탈문에서 원교 이광사의 대흥사에 쓴 글이 여기에 함께 사용되었음을 말씀 드리고, 해탈문 내부의 금강역사상과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다른 사찰의 사천왕문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려 드렸다. 광제루에 이르러 갤러리로 들어갔다. 월출미술인회가 주관하는 “풍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영암 출신의 정선휘 작가가 주축이 되어 매해 4번씩 영암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고 그중에 선별된 작품은 도갑사의 달력을 제작하는데 활용한다.
강릉의 문화계에서 오신터이니 이런 이야기도 선생님들에게는 또 다른 공명을 제공한다. 광제루 2층으로 올라가 산문을 열어 놓은 문을 보면서도 연신 놀란다. 대부분이 출입을 엄금하는데 이곳은 남도라서 그런지 개방성이 또렷해서 좋다고 하신다. 사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웅보전 옆의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한 탑모양의 설치 작품이나 철골을 이용한 탑 작품, 거기에 새롭게 조성하는 문수전에는 뒷면 탱화에 미디어아트를 도입할 작정을 하고 작업중이란 수관 주지스님의 말씀을 전달 드렸다. 불전에서는 의식행사가 있어 직접 내부 설명을 못하고 밖에서 정보를 드렸다. 대웅보전에서 유심히 보셔야 할 것은 관음 32 응신도라는 불화와 뒷벽에 그려진 2002년 월드컵 응원도, 대웅보전 낙성식, 도선국사문화제 행사 모습,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스님과 컴퓨터 작업중인 스님의 그림 등을 권해 드렸다. 격식의 파괴속에 한 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통해 도갑사가 대중과의 소통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보여드린 것이다.
국장생과 금표, 돌이 말하는 사찰의 경계
내린 비로 불어난 용수폭포를 지나 도선국사와 수미왕사의 행적을 담은 비를 만났다. 장장 21년간의 불력이 만들어낸 비석의 내력과 또 그 안에 쓰여진 스님들의 삶이 참으로 장엄하게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이제 도갑사를 나와 죽정리의 국장생을 만난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돌이지만 그 돌을 세운 시기가 1090년임을 표기하고 또렷이 국장생(國長生)이라 새겨져 있어 장승의 유래와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한다.
문화유산을 순례하는 것은 단지 그 자체의 유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지역이나 문화적 갈래의 비교문화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주요한 자양분이 되기 때문에 중독자들이 많은 것이라 여긴다. 경상도의 양산 통도사의 장승이 1085년에 세워졌음이 밝혀져 이 땅의 장승문화의 첫 페이지가 불법승 삼보사찰중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가 시원이고 그 두 번째가 이곳 도갑사란 점을 상기해 드린다. 기능으로 보자면 사찰의 영역 표시로서 세웠음이 후대의 기록에서도 입증된다.
이쯤되면 바로 옆에 있는 바윗돌도 보아야 한다. 암석에 각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건릉 향탄 봉안소 사표 내 금호지지”라고 되어 있다. 건릉은 조선왕 정조의 능이니, 그곳에 쓰일 나무를 제공하는 곳이니 이곳에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라는 뜻이다. 사찰의 영역이란 국장생과 금표가 묘하게 마주하는 이곳의 풍경을 뒤로 하고 이제 점심이다. 왕벚165란 생선구이 정식집이다. 달마지쌀로 솥단지에 직접 해주는 밥맛이 일품이고, 계절에 따라 나오는 각종 생선과 메로구이가 영암의 개미진 맛을 대표하는 곳이다. 모두들 뼈만 남기고 흔적없이 드셔주시니 선택을 잘했다 싶다.
월출산을 넘다, 백운동의 비밀정원
다음 코스는 강진으로 넘어간다. 비가 그친 월출산에 안개가 흘러간다. 지난 밤에 오시느라 월출산을 못보았던 아쉬움이 비로소 차감된다. 풀티재를 넘어서고 경포대 쪽으로 들어서니 태평양에서 운영하는 다원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제주의 오설록에서 경험했던 풍경을 전라도에서 보시니 색다르게 느껴지나 연신 감탄한다. 차밭은 나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백운동원림으로 들어선다. 호남의 3대원림은 담양소쇄원, 보길도 부용동원림, 그리고 이곳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닫혀 있었던 곳이다. 내 자신도 2010년 무렵에 강진군청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는 도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후 한양대학교의 정민 교수께서 펴낸 보고서를 받았고, 이후 글항아리 출판사를 통해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이란 책이 출간되어 세심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가진 책 두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간혹 멀리서 벗들이 오면 더듬더듬 기억을 끄집어 얘기하곤 했다.
비가 오고가길 반복하는 월출산 아랫자락 계곡의 물은 힘찬 기세로 바위를 치고 흘러내렸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온통 먹빛 같은 산길과 그 사이로 하얗게 포말로 부서지며 흐르는 물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전이의 공간을 우리는 걸었다. 드디어 나타난 흰구름이 그윽하게 머문다는 집 백운유거, 하지만 바위에 이 집의 동주였던 처사 이담로 선생이 각자한 백운동이란 글씨가 하늘로 구름이 솟아오를 것 같다. 원림안으로 들어서니 두 개의 연못이 보이고, 연못 귀퉁이로 돌 위에 새긴 글씨가 물속에도 투영된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달빛이 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는 자취가 남지 않네” 나도 강릉의 손님들도 모두 달빛이 되어 원림에 도취해 갔다.(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