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수리 전문가 이빙(李氷)(2)
오로지 백성을 위한 그의 고군분투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도강언의 모습
보의 앞부분은 물고기 머리(주둥이) 모양으로 뾰족했다. 그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성나게 몰아치는 민강을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 같아 ‘분수어취(分水魚嘴)’ 또는 ‘도강어취(都江魚嘴)’로 불렀다. 그리고 어취 뒤쪽의 보를 보호하는 둑 시설은 그 모습이 마치 ‘金’자 같아 ‘금자제(金字堤)’ 또는 ‘금강제’라 불렀다. 어취와 금강제는 민강 상류를 향하여 그 머리를 내밀고 있어 하류로 사납게 흐르는 민강의 물길을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눈다. 서쪽을 외강이라 부르며 민강의 주류이다. 동쪽은 내강이라 부르는데, 관개를 위한 근간이 되는 도랑이고 그 첫 부분이 보병구이다.
강물은 보병구를 지나면서 다시 주마하(走馬河)와 백조하(柏條河) 및 포양하(蒲陽河)의 세 지류로 갈라져 흐른다. 이 세 지류가 아래로 흘러가면서 종횡으로 교차되는 부채꼴의 그물 모양을 이루며 1천 여리 드넓은 성도평원의 논밭에 물을 댄다. 물길을 나누는 보는 민강을 다스리는 이 공정의 주체 부분이다. 삼국 이후 이곳은 도안현(都安縣)에 속했기 때문에 ‘도안언(都安堰)’으로 불렸고, 송·원 이후 다시 ‘도강언’으로 바뀌었다.
보병구는 내강의 수량을 조절하는 대문에 해당한다. 내강으로 흘러드는 수량을 통제하기 위해 이빙은 장인에게 세 개의 석인을 만들게 하여 각각 내강 강바닥에 세워 강물의 수위를 재는 표지로 삼았다. 그는 ‘물이 말랐을 때는 발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물이 넘칠 때는 어깨를 넘지 않는’ 것을 정상 수위로 삼았다. 이밖에 이빙은 쓸려 내려온 흙이 보 양쪽에 쌓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강을 씻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매년 수량이 가장 적은 서리가 내리는 가을의 끝과 겨울 초입에 어취 서쪽에 마차(나무로 만든 삼각대 모양의 차단시설)를 이용하여 외강의 흐름을 끊어 강물을 모두 내강으로 흘러가게 한다. 그런 다음 외강에 쌓인 흙을 씻어낸다. 이듬해 입춘 전후로 외강 작업이 마무리되면 마차를 내강으로 옮겨 강물이 모두 외강으로 흘러가게 한 다음 내강처럼 외강의 흙을 씻어 낸다. 3월 말에서 4월 초 청명절을 전후로 내강의 흙을 씻어내는 작업이 모두 끝난다. 마차를 철거하고 물을 흘려 논밭에 물을 대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마차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마차는 간단하면서 유용한 물을 막는 임시 시설물에 가깝다. 8m 길이의 3개에서 6개의 큰 나무를 삼각대처럼 묶는다. 비어 있는 중간에 가로로 평대(平臺)를 설치한 다음 죽건을 올려 단단히 눌러 장착한다. 그런 다음 이 설치물들을 연결하여 강에 세운다. 그리고 물이 흘러오는 자리에 대자리를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다. 이렇게 하면 잠시 물을 막고 강을 씻어 낼 수 있다.
순조롭게 강바닥을 씻어 내기 위해 이빙은 돌로 다섯 마리의 무소를 만들어 내강에 묻게 했다. 강바닥을 씻어 낼 때 진흙을 파내는 표준 깊이로 삼았다.
위대한 수리공정 도강언
도강언 건설은 민강의 수재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배의 운행과 관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민강 상류의 산림 지역의 진귀한 목재와 대나무가 끊임없이 사천 지역으로 운반되어 민산 지구 농업생산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밖에 도강언은 성도 평원의 엄청난 논밭에 물을 댔다.
도강언 사업은 기본적으로 수해를 막기 위해 민강을 안팎 두 길로 나누는 공정이었고, 그 결과물이 도강언이다. 도강언의 완성으로 사천 지역은 수해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평원을 통해 풍성한 양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안팎으로 ‘진천(鎭川)의 보배’라는 명성이 자자한 대형 수리공사의 역사적 현장인 도강언은 아미산(峨眉山), 청성산(靑城山)과 함께 사천성 3대 경관으로 불린다. 도강언은 무려 2000년 넘게 인류를 위해 매우 유익한 역할을 해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리공정이었다. 도강언은 무려 9500㎢(경기도 전체 면적은 10,171㎢)에 이르는 넓디넓은 성도평원을 ‘기름진 땅이 천 리에 뻗쳐 있는데 가뭄과 홍수를 인간이 다스려 굶주림을 모르며 흉년이 없는’ ‘하늘이 내린 땅’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천고에 빛나는’ ‘진천의 보배’라는 명예를 얻었다.
도강언의 수리공사 과정은 어취(魚嘴),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의 세 부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자동으로 물을 나누고, 모래와 자갈을 밀어내고, 물을 끌어들이고 빼내는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해서 ‘물을 끌어들여 논밭에 물을 대고 홍수를 분산시킴으로써 재앙을 없애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설은 세계 수리건축사의 일대 쾌거이자 중국 고대 노동자들의 지혜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한 뒤 1971년 이날 수리 부문에서 당대 과학기술을 채용하여 도강언에 대한 개조를 마무리함으로써 관개 면적은 해방 전 12개 현 288만 무에서 40여개 지역 1,200만무(약 80억㎡)로 늘어났다.
‘관구이랑’의 전설과 유능한 청백리
당시 치수사업은 이빙과 그의 둘째 아들 이랑(李郞)이 이끌었다. 민간 전설에는 두 사람이 관구(灌口)에서 치수 일을 하고 있을 때 용이 행패를 부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이빙과 이랑은 용을 잡아 가두고 치수사업을 완수했다. 이 때문에 훗날 촉 지역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관구이랑(灌口二○)’이라 불렀다. 훗날 이를 소재로 한 같은 제목의 소설까지 나왔다. ‘관구이랑’은 ‘관구의 두 남자’란 뜻으로 이빙과 그 아들 이랑을 가리키는데, 도강언 수리공사를 이끈 이 두 사람에 대한 칭송의 표현으로 보면 된다. 또 이빙은 하천의 시조라는 뜻의 ‘천조(川祖)’라는 칭송의 별칭을 얻었다.
이빙은 도강언 외에 이퇴(離堆)를 뚫어 말수(沫水)의 수재를 막았다. 이퇴는 지금의 사천성 낙산시(樂山市) 동쪽 1.5km 민강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언덕이다. 말수(수·당 이후 대도하大渡河로 부름)는 몽산에서 발원하여 남안(南安, 낙산)에 이르러 민강으로 들어간다. 산과 절벽이 막고 있어 물살이 매우 빠르고 배가 다니기 매우 어렵다. 산과 절벽에 부딪쳐 배가 부서지기 일쑤였다. 이빙은 백성들과 함께 강바닥에 있는 바위를 깨거나 들어내어 물길을 정리하여 뱃길을 순조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수재가 수리로 바뀌었다. 이빙은 이밖에 다리를 만들고, 염정을 파고, 연못을 파는 등 생활에 꼭 필요한 많은 사업들을 진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빙은 촉군의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촉군을 개발하고 성도 평원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는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 이는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이빙이 세상을 떠나자 촉군의 백성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도강언 내강 동쪽 기슭에 사당을 세웠다. 시인묵객은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앞서 말한 대로 청백리로서 이빙의 모습은 기록이 거의 없다. 그의 행적 대부분이 도강언 축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빙이 청백리의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 오로지 백성을 위한 그의 고군분투와 공직자로서 남다른 유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능한 청백리, 이것이 이빙의 진면목이었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