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PD의 비하인드캠] (28) ‘쇼핑몰 속 축구장’
日 V-바렌 나가사키서 시민구단 생존 해법 엿봐
K리그 시민구단이 마주한 과제는 늘 비슷하다. 만성적인 재정난, 불안정한 관중 동원, 그리고 지자체에 대한 높은 의존도. 과연 지속 가능한, 나아가 자생력을 갖춘 시민구단 모델은 없는 걸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웃 나라 일본 J리그로 눈을 돌렸다. J리그는 K리그보다 앞서 ‘지역 밀착’과 ‘수익 다각화’를 통해 구단의 생존과 성장을 모색해왔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 소도시의 시민구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나가사키의 신선한 ‘발상의 전환’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일본 J2리그 소속 V-바렌 나가사키의 홈구장이었다. 이 클럽은 일본 규슈 서북부, 인구 약 126만 명의 나가사키현을 연고로 한다. 당초 제 계획은 지난해 10월 개장한 최신식 경기장과 선수들을 위한 공간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장에 도착한 순간, 이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곳은 단순히 축구장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었다. 호텔, 식당가, 공연장, 쇼핑몰을 아우르는 거대한 ‘복합 문화 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 ‘축구장’이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은 형태였다. ‘타케노리 타가와’ 구단 대표는 “매년 많은 청년이 나가사키를 떠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거점’으로 이 공간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즉, 도시 재생과 상권 활성화라는 큰 그림 아래, 축구장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축구장 옆 쇼핑몰’이 아닌, ‘쇼핑몰 속 축구장’이라는 역발상이었다.
축구장을 ‘모두의 관광 명소’로 만들다
그렇다고 축구장 본연의 기능에 소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수들 멘탈 관리까지 신경쓴 최신 라커룸, 프레스룸은 기본이고, 그라운드 불과 5m 거리에서 경기를 보며 고급 뷔페를 즐기는 VIP 좌석, 그라운드를 배경으로 방송할 수 있는 오픈 스튜디오까지 갖췄다. 특히 창문만 열면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필드 뷰’ 호텔 객실은 압권이었다.
이처럼 경기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관중석과 통로 하나를 두고 늘어선 현지 식음료 매장과 MD 숍처럼 축구 외적인 경험까지 세심하게 설계했다. 핵심은 ‘축구 팬이 아니어도 즐겨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있었다. 모든 공간을 ‘관광 명소’로 만들려는 시도가 엿보였다. 취재팀이 찾은 경기 일에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2만 석 규모의 경기장에 1만 7000여 명의 관중이 들어찼고, 당일 총방문객은 약 3만 명으로 추산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경기 다음 날’의 풍경이었다. 약 1만 명의 지역민과 원정 팬들이 경기장 내 식당에서 식사하고, 연중 개방된 관람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유료 경기장 투어(1인 2500엔)에 참가하거나, 필드 뷰 호텔에 묵으며, 몇몇은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집라인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경기만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소비하며 ‘관광객’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실제로 경기장 신축 후 원정 팬 수가 10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지속가능성의 열쇠, ‘연결’과 ‘지역’
V-바렌 나가사키 모델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수익 다각화’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경기 입장 수입 외에 복합 시설 운영, 임대료, 관광 상품 판매 등 다양한 경로로 수익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 수익은 다시 구단 운영과 유소년 시스템에 투자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
구단 대표는 장기 비전에 대해 “단기적인 성과를 위해 스타 선수를 영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유스팀에 꾸준히 투자하여 지역 출신 선수를 구단의 상징적인 존재로 키워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튼튼한 모기업(온라인 유통 기업 ‘재팬넷’)의 지원 속에서도, ‘스스로 벌어 생존하는’ 자생력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라는 위치 또한 중요하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쇼핑몰, 식당가와 같은 공간에 축구장을 배치해 ‘특별한 날에만 가는 곳’이 아닌 ‘언제든 들를 수 있는 친숙한 장소’로 인식하게 했다. 여러 시설을 잇는 에스컬레이터, 입구에 자리한 스타벅스 같은 익숙한 브랜드 역시 이러한 의도가 담긴 장치일 것이다.
K리그 시민구단에 던지는 시사점
나가사키의 사례는 여러 K리그 시민구단, 특히 광주FC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청년 인구 유출, 재정 자립, 경기장 접근성과 활용도 문제는 광주가 맞닥뜨린 도시 문제이자, 구단의 오랜 숙원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축구 경기를 하는 팀’을 넘어 지역 사회의 ‘구심점’이자 ‘성장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구단의 인프라를 어떻게 지역 사회와 연결하고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시민과 방문객이 찾아와 소비하고 시간을 보내는, 문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좋은 시설에만 기댄 것이 아니다. 나가사키 구단 직원들은 직접 거리로 나가 전단지를 돌릴 만큼 관중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복합 문화 시설 개발과 프로 축구단 운영을 연계·개발하는 방식은 기업 구단 전환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민관협력(PPP) 모델을 구상할 때 참고할 만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지역 기반의 대기업 건설사 몇 곳을 보유한 광주의 경우, 인근 도시까지 아우르는 ‘광역 연고지’ 개념을 도입한다면 추진 동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일본의 모델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우리 형편에 맞는 ‘한국형 시민구단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번 취재에서는 나가사키 외에도 인구 규모(160만 명)와 평균 관중(5500명)이 광주와 비슷한 ‘로아소 쿠마모토’의 사례도 살펴봤다. 쿠마모토는 500개가 넘는 향토 기업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순수 시민구단으로, 지난해 사상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계속)
J리그에서 얻은 교훈과 영감이 K리그 시민구단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김태관 호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