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은 어디까지 향할 수 있을까
[광주 퀴어 동사무소 에세이] “광장·응원봉·아이돌” 작품 만들며 떠올린 생각들
성소수자는 여기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연재는 광주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조명합니다.
연재의 타이틀인 ‘퀴어 동사무소’는 퀴어 시민이 지역사회에서 ‘보이는 존재’로 자리 잡고,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기록하고 돌보는 공공 공간을 상상하는 의미입니다. 성소수자들은 단순한 정체성 이상의 존재이며, 다양한 차별과 연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이 에세이들이 누군가에겐 용기와 위로가, 또 누군가에겐 이해와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작품을 전시 중이다.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작품이다. 내 모든 작업이 결국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그 총량이 크다. 지난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광장을 채웠던 사랑을 담았기 때문이다. 분노와 좌절, 탄식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곳에서 사랑이라니 무슨 해맑은 소리냐 따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광장으로 향할 때마다, 나중에는 “호떡 먹으러 갈래?”(우리 지역 집회가 열리는 광장 근처에는 호떡으로 유명한 포장마차가 있다)라는 말이 광장에 나가자는 사인이 될 정도로 시위에 참여하는 일이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루틴이 되어버렸을 때, 광장에서 내가 느꼈던 건 분명 사랑이었다. 추운 날씨 속 따뜻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 핫팩이든 소분한 간식이든 옆 사람과 뭐라도 나누려던 손길들, 그리고 깃발 밑으로 밝게 빛나던 응원봉까지. 이 모든 걸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계엄’이라는 처음 겪는 상황 앞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왔는데, 흔들리는 응원봉 속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자니 어딘가 익숙했다. 추운 날씨와 배고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는 일도, 각자가 챙겨온 간식과 물건을 나누는 일도,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까지. 멈춰 서서 생각했다. ‘잠깐. 이거 혹시 덕질…? 내가 지금 민주주의 덕질을 하고 있는 건가…?’ 물론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모인 젊은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팬덤문화의 연장이라는 식으로 납작하게 분석해 버리려는 시선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동안의 덕질이 오늘 광장으로 나오기 위한 연습게임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함께함의 감각을 익혀온 체력장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아이돌 덕질은 단순히 ‘내 오빠/언니’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보면 나와 여자 친구들에게는 광장은커녕 운동장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공을 찰 때, 우리는 운동장 구령대나 계단 밑과 같이 비어 있는 사이 공간에 모여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서로의 비밀과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대화의 중심에는 항상 아이돌이 있었다. 함께 노래를 듣고, 새 소식과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공유했다. 함께 ‘캐해’를 하며 세계관을 만들어 갔다. 때로는 소속사로부터 ‘우리 오빠/언니’를 지키기 위해 ‘키배’를 떴고, 응원의 마음을 담아 글을 쓰거나 응원 도구와 각종 굿즈를 만들었다. 함께 모여 좋아하는 마음을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돌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함께 좋아하는 시간 자체가 소중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그때의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 은박 담요를 두른 채 자리를 지켰던 ‘키세스 부대’에서 영감을 얻어 가상의 아이돌 그룹을 상상했다. 미술관에 방문한 관람객들과 덕질의 감각을 공유하기 위해 그룹 멤버인 ‘민주’와 ‘주의’의 생일을 축하하는 생일카페를 열었다. 생일카페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직접 카페를 빌리고 꾸미는 대표적인 아이돌 덕질문화다. 생일 주인공 없는 생일파티, 팬들이 모여 좋아하는 마음을 나누고 축하하는 일종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민주·주의’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팬이 되어 작품을 감상하길 바랐다. 지난겨울 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덕질했던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그들의 애씀을 함께 덕질하고 싶었다. 덕질의 언어로 광장의 기억을 써보려는 시도였달까. 동시에 궁금했다. “○○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는 말과 함께 시위 참여 인증샷을 올리던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태령으로, 다른 투쟁 현장으로 향할 수 있었는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이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었다.
내가 미술관에서 작품 설명을 요청받았을 때 언급하는 내용은 보통 여기까지. 하지만 우리 퀴어 동사무소 주민분들은 작품을 보고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내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케이팝 아이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던가. 단순히 자긍심을 고취한다거나, 자신을 투영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그룹에는 항상 ‘남자다움’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난 멤버가 있었고 성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코디와 컨셉은 ‘게이팝’이라며 조롱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그랬기에 거침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무엇보다 아이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늘 밝게 빛나지만은 않았다. 여성 의제와 관련한 각종 사회적 이슈로 매일같이 화를 참기 힘든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몇몇 아이돌을 떠나보냈다.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겪으며, ‘페미돌’을 검열하는 세상에서 여자 아이돌과 팬들은 서로를 지켰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함께 성장했다. 어쩌면 ‘아이돌 음악’이 이런 것이었기에 광장에서 끝없이 울려 퍼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여름은 컴백의 계절. 매주 챙겨봐야 하는 무대 ‘직캠’이 쏟아진다. 수록곡까지 싹싹 맛보고 즐겨야 하는 앨범이 공개된다. 추운 겨울을 지나 마주한 일상,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하루를 맞이한다. 러닝을 하면서, 버스에 올라, 밤늦게까지 작업이 끝나지 않을 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엄선한 플레이리스트를 클릭한다. 폴더명 “남돌”. 어김없이 사랑 타령, 사랑을 말하는 가사가 들려온다. 이 모든 노래가 계속해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기를. 우리를 더 멀리까지 데려다주기를. 케이팝아! 우리의 사랑은 늘 투쟁이라 앞으로도 어김없이 이리저리 걷어차이고 굴러떨어져 때가 묻겠지. 싸워야 할 일이 끊이지 않겠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줘.”
이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