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청백리 재상의 전형 소하(蕭何)(1)

최선(最善)의 2인자

2025-07-16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이자 청백리, 나아가 1인자가 가장 얻고 싶었던 2인자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이었다. 

 1인자, 달리 말해 최고 권력자에게 2인자는 몹시 예민한 존재다. 남다른 능력으로 1인자를 보좌하는 자리이지만 언제든 1인자 자리를 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왕조 체제에서는 당연히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2인자, 특히 뛰어난 2인자는 경계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를 2인자 자리에 앉혀서는 조직이나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가기 힘들다. 특히 창업이나 정권 수립이라는 격렬한 투쟁과 진통이 따르는 과정에서 2인자의 역할은 1인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과정에는 정치는 물론 행정·군사·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의 활약에 따라 2인자가 다수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의 활약에 따라 1인자의 자리는 언제든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인자는 2인자, 또는 2인자 못지않은 능력과 실력(군권과 민심 등)을 갖춘 인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이런 인재들에 대한 경계와 처리는 창업 후 시행되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 ‘논공행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잘못 처리되면 바로 정권의 불안으로 이어지거나 정권 자체를 아예 뒤엎을 수도 있는 힘으로 작동한다.

 앞으로 몇회에 걸쳐 살펴볼 한나라 건국의 1등 공신이자 정권의 2인자였던 소하(?~기원전 193)는 권력과 권력자가 안고 있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아가 1인자에게 어떤 2인자가 최선이자 최상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까지 제시하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중국 청백리, 특히 재상급 청백리 계보도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02년 한나라 낙양 남궁에서 벌어진 술자리는 놀랍게도 인재에 관한 토론으로 분위기가 크게 달아올랐고, 그 결과 지금 보아도 참신한 인재관이 도출되었다. 그림은 당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유방의 고향인 강소성 패현沛縣 가풍대歌風臺 패현박물관 내)

 기원전 202년, 그 해 무슨 일이 있었나?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으로 제왕이 된 유방(劉邦 기원전 256~기원전 195)은 기원전 209년부터 약 7년에 걸친 초한쟁패를 끝내고 황제로 즉위했다. 기원전 202년 2월이었다. 그 해 5월, 유방은 낙양(洛陽)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술자리였다.

 이 술자리에서 유방은 뜻밖에 공신들에게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가 자신에게 패한 원인과 자신이 승리한 원인을 분석해보라고 제안했다. 공신들은 각자의 생각을 밝혔다.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의 공신들인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반면, 항우는 인자하여 남을 사랑할 줄 압니다. 하지만 폐하는 사람을 보내 성을 공격하게 해서 점령하면 그곳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반면에 항우는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시기하여 공을 세우면 그를 미워하고, 어진 자를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해도 그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얻고도 그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항우는 이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공신들의 분석을 다 듣고 난 유방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분석을 내놓았다. 이 장면이 ‘세 사람만 못하다’, 즉 ‘삼불여(三不如)’ 장면이다. 그리고 이 ‘삼불여’ 장면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시간을 2천 200년 전으로 돌려 그 장면으로 가보자.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하는 일이라면 나는 자방(子房 장량 張良)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달래고 전방에 식량을 공급하고 양식 운반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웠다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했다하면 틀림없이 손에 넣는 것이라면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고(삼걸三杰), 내가 이들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인데도 믿고 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내게 덜미를 잡힌 까닭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를 이끈 진승의 무덤 구역에 조성되어 있는 전시관 내의 유방과 ‘서한삼걸’을 나타낸 조형물이다. 왼쪽부터 소하·장량·유방·한신이다.

 ‘서한삼걸’로 본 인재상

 사마천은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의 전기이자 한나라 초기 역사인 《사기》 권8 <고조본기>에서 최고 권력자 유방의 입을 빌려 ‘내가 (누구만) 못하다’는 뜻의 ‘오불여(吾不如)’란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세 인재의 능력과 그 중요성을 한껏 부각시켰다. 이 세 사람이 저 유명한 ‘서한삼걸’이다.

 유방은 자신의 성공과 항우의 실패가 ‘인재(人才 talent)’와 ‘인재(人材 human resource)’ 그리고 그 인재들을 기용하는 ‘용인(用人)’이란 문제에서 결판났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유방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리더로서 평가받는 까닭도 그의 이와 같은 남다른 인재관 내지 ‘용인관(用人觀, talent philosophy)’ 때문이다.

 유방이 지목한 세 인재 중 가장 먼저 꼽은 장량(?~기원전 186)은 진나라에 멸망한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집안은 3대가 재상을 지낸 명문가였다. 말하자면 뼛속까지 귀족의 피가 흐르는 인물로, 평민 출신에 건달기가 다분했던 유방과 아주 대조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은 날 가산을 털어 ‘창해역사(滄海力士)’를 기용하여 조국을 멸망시킨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일로 수배자 신세가 된 장량은 우연히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신비한 노인을 만나는 기연으로 귀중한 병법서를 얻었다. 그는 이 병법서를 깊게 탐구하여 전략가로 거듭났고, 유방에게 몸을 맡긴 후 유방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유방에 의해 세 번째로 지목된 한신(?~기원전 196)은 평민 출신으로 별다른 직업 없이 떠돌다 먼저 항우에게 몸을 맡겼다. 몇 차례 건의가 묵살 당하자 한신은 유방 진영으로 건너와 우여곡절 끝에 소하의 눈에 들어 대장군으로 추천되었다. 당시 한중(漢中)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유방에게 한신은 한중을 나갈 방법을 제시했고, 이를 계기로 항우에게 거의 기울었던 초한쟁패의 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천하를 삼분할 수 있을 정도의 비중 있는 세력이 되었으나 유방을 배신하지 않고 끝내 항우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유방이 지목한 세 사람 중 두 번째로 꼽힌, 앞으로 꽤 길게 소개할 소하는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의 공신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유방을 여러 모로 도운, 말하자면 유방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유방의 말대로 정치와 행정이란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초한쟁패 과정에서 발휘한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서한 왕조 최초의 승상(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특히 논공행상의 과정은 살벌함 그 자체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로 넘어간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