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모든 학생에게 진짜 기회를 주고 있는가?

2025-07-21     박고형준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상임활동가.

 “엄마, 아빠. 영어가 재밌어졌어요.”

 저녁 식사 중, 초등학생 딸이 무심코 던진 이 말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나의 어린 시절, 영어는 언제나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런 내게 딸의 말은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질문을 던졌다.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인데, 벌써부터 공부를 좋아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딸은 올해 학기 초부터 영어 교습소를 다니고 있다. 교육 시민단체에서 활동해온 나로서는 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컸고, ‘내가 먼저 딸에게 사교육을 권하지 않겠다’는 신념도 확고했다. 그러나 공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현실 앞에서, 딸의 요청은 나의 신념을 흔들었다.

 

 공교육이 사교육 조장하는 구조 

 처음에는 학교 교육과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해보고자 했다. 마침 광주시교육청 창의융합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원어민 화상수업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무료이고 학생, 학부모 만족도도 높아 망설임 없이 신청했고, 선착순 접수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당시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며 영어의 첫 발을 딛는 수준이었고, 전적으로 영어로만 진행되는 원어민 수업은 분명 벅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의융합교육원 담당자는 ‘영어를 잘 못해도 괜찮다’, ‘학생 수준에 맞춰 수업이 진행된다’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미 선행학습을 마친 또래들과의 학습 격차는 컸고, 결국 딸은 수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배움의 기쁨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한 시간으로 남았다. 이를 지켜본 부모로서 느낀 자책감과 무력감은 매우 컸다.

 그런데도 광주시교육청은 이 프로그램이 원어민과의 소통 기회 제공을 통해 사교육비를 절감한다고 자평한다. 정말 그럴까? 실제로는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만 혜택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오히려 위축돼 사교육으로 내몰리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공교육이 사교육을 조장하는 구조는 이번 사례로 그치지 않는다. 최근 고등학교 입학 전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특수목적고등학교인 광주예술고에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을 신설해 교육 기회를 확대하자는 제안에 한 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학생들은 들어가도 버티지 못합니다. 사교육 등 경제적 지원 없이는 경쟁에서 뒤쳐져 좌절과 패배만 겪을 거예요.”

 그 위원이 예술고 학부모였다고 하니, 현실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을 곱씹을수록 씁쓸하다. 과연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사회적배려자에 대한 진정한 배려일까?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배움 포기않도록

 배우고자 하는 학생이 마음껏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공교육의 본질적 책임이다. 그 책임을 개인과 가정에 떠넘기는 순간, 사회는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너는 애초에 꿈도 꾸지 마라.”

 화상수업을 포기해야 했던 딸의 경험, 특목고에 입학해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모든 학생에게 진짜 기회를 주고 있는가?”

 그래서 공교육은 더 강해져야 한다. 영어든 예술이든, 어떤 배움이든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은, 학생들이 그 나무를 오를 수 있도록 희망의 사다리를 함께 놓아주는 일이다.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진짜 ‘배려’다.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