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의 용기와, 침묵
[백청일의 독서일기] (53)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흔히, 요즘 사회를 “말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인터넷과 SNS의 댓글과 온갖 종류의 정보들과 가짜뉴스까지, 쏟아지는 말과 정보의 홍수 시대.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쏟아지는 정보와 실시간 소통으로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으니, 하루를 말의 홍수 속에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침묵이 필요한 시대”라고도 합니다.
“뭐라고? 침묵하라고?”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자기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말해야 하는 무한경쟁 시대에 침묵이란 열등감이나 무능력, 비겁함과 회피, 우유부단함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침묵이란 곧 경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침묵하라니?
하지만 ‘침묵’에 대한 존경을 담은 격언이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침묵’으로 검색해 보면,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이 알려진 것도 있고, 의미를 곱씹어 보면,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토마스 칼라일).
“시의적절한 침묵은 말보다 설득력 있다.”(마틴 파쿠아 터퍼).
“입을 열어 모든 의혹을 없애는 것보다 침묵을 지키며 바보로 보이는 것이 더 낫다.”(링컨).
그런데 무한경쟁시대에 나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했던 ‘침묵’이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침묵’을 수행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요? 그 강요가 사람일 수도 있고, 일이나 사건일 수도 있고, 상황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단체, 집단이라면? 나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침묵’이 직접적인 강요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던 ‘처세술’의 일종이었다면? 피치 못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불가항력이었다고 항변했던 게 실은, ‘침묵’으로의 ‘손쉬운 선택’은 아니었을까요? 상처받기 싫어하는 회피와 비겁함을 포장하는.
‘침묵이 강요된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걸 폭력 또는 폭력적 상황이라고 합니다. 혹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나와 우리가 하고 있는 침묵이 실은 강요된 침묵이었음을 깨닫고, 폭력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구나, 하는 걸 알아챈다고 해도, 그러한 상황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폭력에 대한 타성에 젖은 사람이 혼자 힘으로 ‘용기’를 내어 의지적으로 폭력적 상황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다루려고 합니다. 작품을 ‘상실’과 ‘방치’를 중심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필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소녀가 어떻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을 위해 ‘용기 있는 침묵’을 결심하고, 더 나아가 그보다 “더욱 심오한” 사랑을 가득 담은 “아빠”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침묵’, ‘용기’, ‘사랑’을 핵심어 삼아 ‘강요된 침묵’과 ‘명상의 침묵’을 대립쌍으로 보고, ‘명상의 침묵’이 때로는 ‘용기 있는 침묵’과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배려와 인내 가득한 사랑’이라는 걸로 풀어보겠습니다.
작가와 작품 소개
클레어 키건은 세계의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는 아일랜드 작가입니다. ‘맡겨진 소녀’(원제목은, ‘foster’)를 출판한 ‘다산책방’은 작품의 앞표지와 뒤표지 등에 여러 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임즈>는 “키건은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다”라고 했으며,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했습니다.
키건은 얇고 예리하면서도 우수한 소설을 쓰는데, 그만큼 ‘덜어냄’과 독자들의 ‘해석’을 중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키건은 작품 활동을 한 25년 동안 다섯 권의 책을 썼는데, 국내에서는 다산책방이 ‘맡겨진 소녀’를 포함해 ‘푸른 들판을 걷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너무 늦은 시간’을 순서대로 번역 출판하고 있습니다.
키건은 ‘맡겨진 소녀’는 중편 분량이지만, 중편 소설의 흐름이 아니기 때문에 “긴 단편 소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22년 콤 바이레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2023년 개봉되기도 했습니다.
키건은 우물, 양동이, 물에 비친 소녀의 모습이라는 이미지에서 작품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작품은 어린 소녀 ‘나’의 시점에서 “보인다”, “헤맨다”, “도착한다”처럼 ‘-ㄴ다’의 현재형 문체로 진행됩니다.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 문체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풀어질 때의 효과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1981년 아일랜드 시골 지역. 4명의 자녀를 둔 메리-댄 부부가 다섯째의 출산을 앞두고 여름 몇 개월을 먼 친척 집 킨셀라 부부(에드나-존)에게 맡긴 어린 소녀 셋째딸의 이야기입니다.
소설가 김금희는 ‘맡겨진 소녀’에 대해 “매끈하고 깨끗하고 연약한 시절로 데려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섬세한 사랑을 손안에 쥐여주는 이 소설의 가슴 벅찬 여름날들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영화감독 김보라는 “고요하지만 뜨겁게 끓어오르는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감정을 자아낸다”며, “인간이 생에 걸쳐 거듭 풀어야 할 원형적 감정들을 깊이 있게 다루며,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정수를 펼친다”고 하였습니다.
‘강요된 침묵’과 ‘명상의 침묵’
국어사전에 정의된 ‘침묵’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또는 그런 상태”이고, 두 번째는 “어떤 일에 대하여 그 내용을 밝히지 아니하거나 비밀을 지킴, 또는 그런 상태”(네이버 국어사전)입니다.
국어사전의 첫 번째 ‘침묵’의 정의에서 우리는 그 ‘침묵’을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명상에 잠길 때 하는 침묵과 강요와 폭력에 의한 힘에 짓눌릴 때 하는 침묵입니다. 둘의 차이는 ‘자신의 선택’인지, ‘강요에 의한 선택’인지로 구분할 수 있고, 이를 ‘긍정의 침묵’과 ‘부정의 침묵’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하는 침묵’은 어떤 사람과 일, 사건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면으로 끌어들여, 오랫동안 지켜보고, 마주하고, 대화하는 무한 되먹임의 반복과 시간이기도 합니다.
‘강요에 의한 선택으로 하는 침묵’은 폭력적 상황을 포함해 성적은 올랐니? 실적은 어떤가? 결혼은? 취직은? 자녀는? 노후 계획은? 질문처럼, 어떻게 답변해도 이어지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스트레스와 상처를 줄 때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택한 선택지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앞의 걸 ‘명상의 침묵’으로, 뒤의 걸 ‘강요된 침묵’으로 정의하겠습니다.
국어사전의 두 번째 ‘침묵’의 정의에는 적극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비밀을 밝히지 않겠다는 주체적인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치하 민주화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를 때 어떤 고문과 협박에도 조직과 조직원/동지들을 불지 않겠다는, 죽음을 불사한 신념을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필자는 이를 ‘용기 있는 침묵’으로 정의하겠습니다.
필자는 ‘강요된 침묵’과 ‘명상의 침묵’을 대립쌍으로 사용하고, ‘명상의 침묵’이 때로는 ‘용기 있는 침묵’과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배려와 인내 가득한 사랑’이라는 걸로 이어보겠습니다.
‘강요된 침묵’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아이들 네 명을 깨우고 씻기고 학교나 성당에 보내고, 식사 준비와 마무리 등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고, 송아지 이유식 먹이기부터 밭일 도와줄 일꾼 부르기 등 바깥일까지 한 시도 쉬지를 못합니다.
아빠는 밭일을 하지만 집안일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부엌 바닥에 떨어진 루바브 줄기 하나 주울 줄 모릅니다. ‘나’가 볼 때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 허풍이나 허세가 있습니다. “카드 게임을 하다가 붉은 암소를 잃”을 정도로 도박 중독이고, 식사를 빠르게 하고 얼른 나가 담배 피우려고만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줄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거칠게 대하는데,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성실하지만 아이들에게 관심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엄마.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별 관심이 없고 남자는 마치 바깥일만 하면 된다는 듯한 아빠. 작년의 건초 삯을 주지 못해 일꾼을 구하지 못할 정도인데, 다섯째가 곧 태어나니, 어떻게든 한 명의 자녀라도 맡겨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 형편.
이런 환경에서는 엄마, 아빠와 아이들 사이에,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대화가 쉽지 않겠지요.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아빠는 킨셀라 부부에게 딸을 맡기면서 “많이 먹겠지만 대신 일을 시키세요”라고 하거나, 어린 딸에게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어린 딸을 맡겨놓고 돌아가면서도 킨셀라 부부에게 “행운을 빕니다”라고 하고, ‘나’에게는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온 어린 딸이 재채기를 하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모습을 보고는 몇 개월 동안 돌보아준 킨셀라 부부에게 “제대로 돌보질 못하시는군요? 본인도 아시잖아요?”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서둘러 돌아가려는 킨셀라 부부를 보고 있던 딸에게 “그 꼴로 돌아오다니, 잘한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온 ‘나’에게 “좀 컸구나” 묻자, “네”라고 대답하는 나에게 몹시 놀랍니다. “‘네’라고 했니?” 하면서. 엄마의 놀람은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재채기를 하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묻자 맡겨지기 전이었으면 침묵하거나, 사실대로 말했을 텐데, ‘나’는 계속해서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라고 말하니. 엄마가 이상하다며 빤히 쳐다보는데도.
가난하고 힘들고 벅찬 하루하루에 엄마, 아빠는 지시하고 명령하는 거에 익숙하고, 부부끼리 대화해도 결국은 아빠 뜻대로만 하고, 자녀들은 어떤 대꾸도 없이 묵묵히 따라야만 하는,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집안 형편과 가족관계라는 걸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침묵’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의 침묵을 ‘강요된 침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명상의 침묵’
킨셀라 부부는 “전기 울타리로 길쭉하게 나뉘어져 있”는 “넓고 평평”한 밭을 가지고 있고, “한쪽 구획에서는 키 큰 홀스타인 젖소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플러그를 꽂는 커다란 냉동고도 있고, 청소기로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아직 덜 마른 옷을 걷어와 다리미판에 다리기도 합니다.
킨셀라 아주머니도 엄마처럼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킨셀라 아저씨처럼 “무슨 일을 하든 절대 서두르지 않지만 쉬지 않고 바지런히 움직”입니다. 요리를 할 때 ‘나’에게 “나가서 파 몇 가닥 뽑아 오렴. 착하지”라고 하기도 하고, 토스트를 구울 때 ‘나’가 직접 할 수 있도록 시범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나’와 함께 얼음도 얼리고, 청소도 하고, 햇감자도 캐고, 빵도 만들고, 소스도 만들고, 루바브 뽑기, 잡초 뽑기 등 집안일과 바깥일을 합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빠에게 부엌에 떨어진 루바브 줄기를 주워 건네줄 정도로 부엌일 하는 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바깥일을 하다 잠깐 들어와 아주머니와 ‘나’ 세 사람이 마실 차를 끓이고 마신 후 다시 나가기도 합니다. 단식 투쟁을 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본 후, 식사할 때 “어떤 남자는 굶어 죽었는데, 여기서 나는 이 좋은 날에 두 여자한테 얻어먹고 있”다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는 배려의 말을 할 줄도 압니다.
밤에 사람들이 찾아와 학교 지붕 교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 복권을 팔러 다닌다며 들를 때도,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하며 사람들을 대접하기도 합니다. 어린 ‘나’가 보기에도 “이 집은 다르다. 여기에는 여유가, 생각할 시간이 있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나’의 집에 비해 “여유와 여윳돈”이 있는 집이지만, 킨셀라 부부에게는 실은, 커다란 상처가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상실 때문에 내면 가득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가 도착한 날 킨셀라 부부는 죽은 아들의 방에 ‘나’를 재우고, 아들이 입던 옷을 입혀줍니다. ‘나’가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내색하지 않은 채.
그러던 어느 날, 킨셀라 아저씨는 ‘나’가 일요일 미사를 보러 가려면 더 괜찮은 옷이 있어야 한다며 새 옷을 사러 가자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 에드나” 하는 아저씨의 말을 들은 이후 채소를 다듬던 아주머니의 손이 점점 느려지고,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오랫동안 욕실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던 킨셀라 아저씨가 창문을 바라보는데, ‘나’의 눈에 “흔들리고 있”는 “아저씨의 마음속 저 안쪽에서 커다란 문제가 기지개 켜는”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이내 욕실에서 나온 킨셀라 아주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네 옷이 생기면 정말 좋을 거야”, “지금껏 널 거기 데려갈 생각을 왜 못 했을까”라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저마다의 웃음 뒤엔 아픔이 있어”(싸이의 ‘기댈 곳’)라는 노랫말처럼 킨셀라 부부 또한 여유있게 살면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내면 가득 상실의 아픔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출산으로 어린 딸을 맡아 달라는 먼 친척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고, 그 어린 소녀와 함께 생활하며 죽은 아들에 대한 상처가 되새겨졌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았던 거지요.
필자는 앞에서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또는 그런 상태”의 ‘침묵’ 중 긍정의 침묵을 ‘명상의 침묵’으로 정의하였는데, 죽은 아들을 대하는 킨셀라 부부의 침묵이 바로 ‘명상의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면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직시하면서,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들의 슬픔에 빠져 주변에 소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
필자는 킨셀라 부부가 어린 소녀를 돌보면서 또 다른 차원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승화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모습에서 ‘명상의 침묵’이 ‘용기 있는 침묵’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명상의 침묵’이 가지고 있는 힘은 어린 소녀인 ‘나’에게도 ‘전이’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그 밑바탕에 ‘배려와 인내 가득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려와 인내 가득한 사랑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나’는 킨셀라 부부가 돌아간 이후 엄마에게 취조당하듯 질문을 받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럼에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엄마에게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라며.
‘맡겨진 소녀’는 두 가지 큰 사건을 품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앞에서 말한 킨셀라 부부의 아들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어린 소녀인 ‘나’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작품의 ‘위기’에 해당되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읽어보고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끔찍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나’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고 깨달을 수 있었던 건, 바로 킨셀라 부부의 ‘배려와 인내 가득한 사랑’의 보살핌 덕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집에 온 첫날 킨셀라 아주머니는 ‘나’를 자신의 딸처럼 씻겨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기도를 해 줍니다. 첫날밤을 자고 난 후 ‘나’가 긴장으로 실례를 해 버린 매트리스를 보며, “매트리스가 낡”았다며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라며 자신을 자책하면서 어린 소녀의 마음을 풀어주려고도 합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일하는 사이 시간을 내 날마다 현관에서 대문 우편함까지 편지를 가져오게 달리기를 시켜 기록을 단축하게 해줍니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운동을 시켜주는 거지요. 초상집에 갔을 때 아저씨의 무릎에 앉아 있을 때 무겁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넌 깃털 같단다, 얘야. 그냥 앉아 있어”라고도 합니다. 새 신발을 길들여야 한다며 밤중에 손을 잡고 바닷가를 산책하며 맨발로 파도를 맞기도 하고, 돌아올 때 직접 발을 씻기고 신발을 신겨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침묵의 미덕’을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필자는 킨셀라 아저씨의 말이 ‘명상의 침묵’에서 ‘용기 있는 침묵’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킨셀라 부부의 보살핌으로 어린 소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킨셀라 부부는 어린 소녀를 데리고 엄마, 아빠와 만난 후, 서둘러서 돌아가게 됩니다. 자신들의 삶의 한 공간에 딸처럼 자리를 차지하게 된 어린 소녀와의 이별의 슬픔을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서. 몇 개월을 맡아 준 거에 대한 감사의 인사 대신 감기 걸려 왔다며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아주 잘 한다는 나무람과 비아냥은 킨셀라 부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겠지요.
그때 돌아가는 킨셀라 부부를 보며 ‘나’는 맡겨지기 전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을 합니다. 킨셀라 부부의 차는 이미 떠나버렸고, 눈에 보이지 않는데, 대문 앞에 멈춰서는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녀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 모퉁이를 돌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 곳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대문 죔쇠를 돌려놓고 다시 잠그고 있다. ….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어린 소녀는 그동안 ‘강요된 침묵’의 부정성에 휩싸여 있었지만, 킨셀라 부부와 함께 지냈던 몇 개월 동안 어느새 긍정적인 ‘명상의 침묵’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다그침에도 자신의 의지로 말하지 않겠다는 ‘용기 있는 침묵’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작품의 결말에서 적극적인 행위로 표현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말’로 표현하게 됩니다.
감동이 중첩되는 작품의 결말은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없이 굳세게 다가”오는 아빠,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은 킨셀라 아주머니, “더욱 심오한 무언가”, 두 번 부르는 “아빠”의 이중적 의미로 오랫동안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소녀가 “아빠”라고 부르는 걸 소리내어 읽어 보면, 또 다른 감동이 다가옵니다. “긴 단편 소설”, ‘맡겨진 소녀’의 일독을 권합니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차려입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아저씨의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아저씨의 어깨 너머를 보자 아빠가 보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백청일(논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