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중국차(茶)] (77) 전란의 질곡에서 태어난 홍차

“녹차에 비해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성질의 차에 열광하였다”

2025-07-29     류광일
소종홍차는 소적감(小赤甘)과 대적감(大赤甘)으로 등급이 나눈다. 소적감에서 적(赤)은 ‘붉을 홍(紅)’과 같은 뜻이고 감(甘)은 복건성 방언으로 차(茶)이다. 따라서 ‘적감’은 바로 ‘홍차’이다. 크고 작음에 따라 그 등급이 나뉜다. 서양인들이 이 차를 처음 봤을 때 그 빛깔이 검어서 “Black Tea”라고 부르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미 장년층이 된 나는 어렸을 적 “대항해 시절을 전후하여 중국에서 녹차를 싣고 유럽으로 가던 배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나갈 무렵 더운 날씨와 습도 때문에 발효가 일어나 홍차로 변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더 흘러 중국 현지에서 들었던 새로운 이야기에 귀가 더 솔깃해졌다. 내용은 “명말청초(明末淸初, 1628~1700) 권력 교체 시기의 어느 봄날 녹차 제다로 분주하던 동목관(桐木關)으로 한 무리의 청나라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이에 농민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으로 도망쳤고, 점령군들은 찻잎이 들어있는 포대를 바닥에 깔고 이리저리 뒹굴며 지내다가 마을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철수하였다. 농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찻잎이 든 포대를 살펴보니 찻잎은 이미 군인들이 깔아뭉갠 탓에 발효와 유념이 된 상태였다. 어찌 되었든 농민의 처지에서는 생계가 달린 문제라 비록 얼마간 변질된 찻잎이라도 다소나마 비용을 회수하고자 본래의 녹차 제다법과 같이 살청-유념-건조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차를 만들어냈다. 이를 도회지의 상인들이 가져다 판매하자, 소비자들은 예전의 녹차에 비해 훨씬 향기롭고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성질의 차에 열광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전란의 혼란스러운 와중에 동목관 일대에서 최초의 소종홍차(小種紅茶) 제다법이 등장하였다. 이 소종홍차에 대해 각지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주문이 폭발하자, 18세기 중엽에는 소종홍차의 제다법을 기초로 공부홍차(工夫紅茶)의 제다법이 등장하였다. 1753년 청대의 유정찬(劉靖撰)이 쓴 편각음한집(片刻飮閑集)에는 “암차(岩茶)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노수소종(老樹小種)이고, 다음으로는 소종(小種)이며, 소종공부(小種工夫), 공부(工夫), 공부화향(工夫花香)의 순서이다”라고 기재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소종(小種)과 공부(工夫)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절기(揉切機)의 구조도. 위조를 마친 찻잎을 상부의 투입구로 집어넣으면 롤러의 힘으로 찻잎을 부수고, 찢고, 말아서 작은 조각들로 만들어 준다.

 1875년을 전후한 시기에 공부홍차의 제다법은 안휘성(安徽省)까지 전파되었고, 녹차를 생산하던 기문현(祁門縣)에서도 홍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문홍차는 특수한 향과 진한 맛으로 세계시장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와 함께 호남(湖南)의 상홍(湘紅), 복건(福建)의 민홍(閩紅)이 있다. 민홍은 산지에 따른 품종이 달라 서로 다른 맛과 향이 나기에 탄양공부(坦洋工夫), 백림공부(白琳工夫), 정화공부(政和工夫)로 나눈다. 이와 함께 강서(江西)의 영홍(寧紅), 호북(湖北)의 의홍(宜紅), 대만(臺灣)의 대홍(臺紅) 등은 모두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공부홍차라고 할 수 있다.

 1951년 국제시장의 수요로 인하여 녹차를 생산하던 일부 지역에서 공부홍차의 생산을 장려하여 사천(四川)의 천홍(川紅), 절강(浙江)의 월홍(越紅)이 생산되었다. 여기서 운남(雲南)의 전홍(滇紅)은 1939년부터 만들어졌으나, 품질이 떨어져 1950년 무렵의 생산량이 수 t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1952년 봉경(鳳慶)과 맹해(勐海)의 두 곳에서 홍차가 생산되면서 금호(金毫)로 뒤덮인 외형과 농밀한 향과 구감으로 인하여 국제 차 시장에서 호평받았다.

 한편 유럽에서는 소종홍차의 인기가 날로 치솟아 품귀현상이 일어나자, 이를 운반하던 무역선들은 중국에서 유럽까지의 운송 기간을 단축하고자 배의 형태를 극단적인 유선형으로 디자인하였다. 그 결과 속도는 빨라졌으나, 안전성을 상실한 단점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숫자의 배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후과를 초래했지만, 무역상들은 성공했을 때 가져다주는 이익이 너무 컸기에 기꺼이 모험을 감행했었다. 이와 같이 중국 홍차에 대한 유럽의 수요는 무역 역조로까지 이어졌고, 결국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내다 팔아 종국에는 아편전쟁으로 번졌다.

 그 후 중국의 홍차 제다법은 19세기 인도ㆍ스리랑카 등지로 퍼져 나갔고, 때마침 영국에서 등장한 증기기관을 이용 유념과 절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유절기(揉切機)의 등장으로 산화·발효가 한결 쉬워진 CTC 홍차가 있다. 여기서 CTC는 부수고(Crush), 찢고(Tear), 말고(Curl)의 약자이고, 한자로는 ‘부숴놓은 홍차’라는 뜻의 홍쇄차(紅碎茶)가 된다.

 이와 같이 홍차는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고, 그 비조(鼻祖)가 바로 △소종홍차이다. 이 차가 날이 갈수록 인기를 얻게 되자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이 △공부홍차이며, 기계의 힘을 이용하여 속성으로 만들어진 것이 △홍쇄차이다. 홍차는 크게 이 세 종류로 구분한다.

 중국내에서 유통되는 홍차는 크게는 소종홍차 한 가지와, 공부홍차 십 수종으로 나눈다고 볼 수 있다.

 류광일(덕생연차관 원장) 

류광일 원장

류광일 원장은 어려서 읽은 이백의 시를 계기로 중국문화에 심취했다. 2005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사범대학에 재학하면서 덕생연차관 주덕생 선생을 만나 2014년 귀국 때까지 차를 사사받았다. 2012년 중국다예사 자격을, 2013년 고급차엽심평사 자격을 취득했다. 담양 창평면 덕생연차관에서 다향을 내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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