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대하는 삶의 자세] 동아시아 신화 속의 뱀 이야기⓶

신화 속 뱀 맹독 품은 신, 혹은 왕의 아내? “밤에만 찾아오는 남편의 정체는 뱀!” 일본 건국 신화부터 ‘술의 신’까지…

2025-08-05     강은영
미와야마. 나라현 관광 공식 사이트.

 뱀은 세계 각지의 신화에 등장한다. 탈피를 반복하는 특징에서 생명력과 불사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맹독을 가지고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조몬시대(신석기시대)의 토기에 뱀을 형상화한 모양이 다수 보인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뱀은 고대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동물이다. 야요이시대(청동기·철기시대)에 대륙에서 전해진 벼농사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농지와 수로 등에서 자주 목격되는 뱀을 수신(水神), 혹은 수신의 사자로 여겨 신봉했다. 곡식은 물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뱀은 곧 농사의 신이기도 했다. 게다가 뱀의 형상은 벼락과 닮아서 뱀은 뇌신(雷神)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일본의 뱀 신화는 고대 국가의 형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본이라는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빨라야 7세기 후반이다. 국명 표기는 ‘일본’이라고 하더라고 읽기는 ‘야마토’라고 읽었다. 즉 고대 일본의 국명은 ‘야마토’로 이 정권을 야마토 왕권이라고 한다. 야마토는 본디 나라현(奈良縣)의 동남쪽 지역의 명칭으로, 야마토 왕권의 발상지다. 이곳에는 미와야마(三輪山)라는 우리나라의 필봉처럼 생긴 예쁘장한 산이 자리 잡고 있다. 고대 일본인들은 필봉처럼 잘생긴 산을 ‘신이 강림하다’라는 뜻을 가진 ‘간나비(神奈備)’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신성한 미와야마에는 ‘오쿠니누시(大國主神)’라는 뱀 신을 모시는 오미와신사(大神神社)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신사에는 신체(神體)를 모시는 본전이 없이 배전만 존재한다. 미와야마 자체가 신체이기 때문이다. 800만의 신이 존재한다는 일본 신도(神道)의 세계에서 신은 인간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신이 깃들 수 있는 요리시로(依代)인 신체(神○)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신의 신체는 거울이거나 검이기도 하며 옥이 되기고 한다. 그런데 미야야마의 신은 신체가 필요 없는 거의 유일한 신으로, 일본 신도(神道) 안에서도 매우 독특한 사례다.

오미와신사. 나라현 관광 공식 사이트.

 미와야마의 신인 ‘오쿠니누시’는 원래 야마토의 신이 아니라 ‘이즈모(出雲, 오늘날의 시마네현)’ 지방의 신이었다. 신화에서 이즈모 지방은 야마토 지방에게 지상의 권력을 양보한 대신 천상세계를 다스리기로 하였고, 대신 야마토 왕권의 왕들은 자손 대대로 이즈모의 신들을 정성스레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스진천황(崇神天皇) 때에 이르러, 고레이천황(孝靈天皇)의 황녀이자 무녀로서 천황의 정치를 보좌하던 야마토토토비모모소히메(倭迹迹日百襲姬)라는 여성이 있었다. 황녀는 미와야마의 신인 ‘오모노누시’의 아내가 되었는데, 신은 밤에만 아내를 방문했다. 하루는 황녀가 남편의 얼굴을 밝은데서 보고 싶다고 간청하자 남편은 놀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침이 되면 빗을 담아 놓은 상자를 열어 보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황녀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안에 있던 것은 자그맣고 예쁜 뱀이었다. 황녀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자 신은 뱀에서 잘생긴 남성으로 모습을 바꾸고 약속을 어긴 황녀를 꾸짖으며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하늘을 날아 미와야마로 돌아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실린 ‘오쿠니누시’의 일화인데, 『고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한다. 정체불명의 남편의 진짜 모습을 알고자 했던 한 여성이 남편의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았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 가보니 실은 대문의 열쇠 구멍을 통해 미와야마의 사당까지 이어졌다. 열쇠 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가드다란 뱀의 모습이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와야마의 산록에 위치한 오미와신사의 경내에는 ‘오쿠니누시’의 화신인 흰 뱀이 산다는 ‘사신(巳神) 삼나무’가 있다. 이 삼나무의 효능은 다양하지만, 특히 뱀이 재생을 상징하듯 병을 치유하는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전염병이 유행하면 날달걀을 바쳐 기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 뱀 신 ‘오쿠니누시’는 술 담그기와 관련한 전승도 있어서 술의 신이기도 하다. 지금도 삼나무 앞에는 뱀이 좋아하는 달걀과 함께 술이 바쳐지고 있다.

 이외에도 유명한 뱀 신으로는 ‘야마타노오로치’가 있다. ‘스사노오’라는 신이 천상계(다카마하라)에서 추방되어 이즈모국에 내려왔는데, 한 소녀를 둘러싸고 울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이 노부부는 이즈모국의 신들로 딸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매년 한 명씩 산에서 내려온 아마타노오로치에게 잡혀 먹혔다고 하였다. 스사노오는 노부부의 마지막 남은 딸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한다. 야마타노오로치는 아주 큰 뱀으로 스사노오가 검으로 오로치를 반쪽으로 자르자 그 안에서 큰 칼이 나왔고, 스사노오는 이 칼을 일본 신도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에게 헌상하였다. 나중에 이 큰 칼은 ‘구사나기검(草雉劍)’이라 불리며, 일본 황실의 삼종 신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고대 중국에서 수신은 용이다. 용은 상서로운 존재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또한 바다와 하천의 지배자였고 물과 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수신이었다. 반면 일본에서 수신은 용이 아닌 뱀이다. 후대에 중국의 용 신앙이 일본으로 전래되어 뱀 신앙은 용신신앙과 겹치게 되었다.

 강은영(전남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