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피어나 풍성한 생명력 마음마저 뜨거워져
[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79) 폭염과 폭우 속에도 위로를 주는 배롱나무 백일홍(百日紅)에서 유래한 이름
요즘,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밀려오는 여름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계절 속에서, 무각사 마당에도, 아파트 화단에도, 앞산뒷산, 도로 가로수 옆에도 붉은빛 꽃을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는 문득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무더운 계절에 피어나는 꽃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특히 전남 담양의 명옥헌 원림은 배롱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그곳에 들어서면 정적을 깨는 것은 바람과 물소리뿐. 뜨거운 여름과 소낙비 속에서도 푸른 그늘 위에 수놓아진 붉은 꽃들은 더위를 식히고 마음에 평온을 건넨다. 햇살에 타오르듯 붉게 피어난 배롱나무 꽃을 올려다보면, 그 풍성한 생명력에 오히려 마음마저 뜨거워지는 듯하다.
배롱나무는 이름 그대로 ‘백일 동안 붉게 피는 꽃나무’라는 의미의 백일홍(百日紅)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세월을 지나며 ‘배롱’으로 음운 변화되었고, 오늘날 ‘배롱나무’로 자리 잡았다. 이 나무는 ‘간지럼나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매끈한 줄기를 손톱으로 살짝 긁으면 나무 전체가 간질간질 흔들리는 독특한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얼음이 녹는 봄에도 쉽게 잎을 내지 않아 ‘양반나무’라 부르기도 하며, 자줏빛 꽃이 피어난다 하여 자미화(紫薇花), 붉은 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어 만당홍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이름들 속에는 생태적 특징은 물론, 사람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룡나무의 생태적 특징은 낙엽활엽 작은 키나무로 줄기는 높이 3-7m이다. 줄기껍질은 붉은 갈색이고 벗겨진 곳은 흰색이다. 잎은 마주나거나 어긋나며 타원형 또는 도란형으로 앙증맞다. 꽃은 7월부터 9월까지 붉은색·보라색·흰색 등 다채로운 색으로 뭉쳐 피며, 끝이 살짝 주름진 6장의 꽃잎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원산지는 중국 남부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일본 등에서 관상용으로 널리 심어진다.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는 냉방기기와 콘크리트 구조물로 인해 열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열섬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 속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가지는 의미는 더없이 크다. 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향후 도시의 조류 종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지만, 도시 녹지 관리를 통해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이런 시대에 잘 어울리는 나무다. 기후 적응력이 뛰어나 한여름 더위에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고, 줄기가 말라도 금세 새순을 내며 회복하는 강인함을 지녔다. 병충해에도 비교적 강하고, 뿌리가 얕게 퍼져 가로수로 심기에도 부담이 적다. 아름다운 꽃에 비해 교목이 아니기 때문에 공원수나 도시 정원수로도 인기가 높다. 최근에는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거리 곳곳에 배롱나무를 심는 사례도 늘고 있다. 삭막한 담장을 허물고 배롱나무 몇 그루를 심었더니 동네 분위기가 훨씬 따뜻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무엇보다 배롱나무는 사람과 정서적 유대를 맺는 나무다.
한여름 밤, 저물지 않는 붉은 꽃송이 아래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순환을 느낀다. 풍성하게 피었다가 바람결에 꽃비 되어 흩날리는 모습은 삶의 덧없음을, 다시금 꽃망울을 터뜨릴 내년을 생각하면 희망과 인내를 떠올리게 한다. 그 순간, 도시 생활 속에 묻혀 지내던 우리 본연의 감각이 조용히 깨어난다.
광주 중앙공원이 대한민국 국가도시공원 1호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만약 이곳에 다양한 수종의 숲과 사계절 빛나는 배롱나무숲이 조성된다면, 단순한 녹지 공간을 넘어 국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국민의 건강 증진과 일상 속 문화 향유의 기회까지 넓어질 것이다.
기후재난의 시대, 우리는 도시 곳곳에 녹지 공간을 확보하고 지켜나가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녹색 공간은 단지 나무 몇 그루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생존 기반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적 안식처이기도 하다. 배롱나무가 활짝 핀 명옥헌의 정원, 공원의 꽃길, 앞산과 뒷산의 오솔길, 가로수 아래 드리운 붉은 그늘은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붉은 꽃그늘 아래로 모여든 나비들과 꽃길을 걷는 사람들의 미소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그리고 폭염 속에서도 배롱나무가 건네는 시원한 위로 한 자락이 우리의 일상 속 곳곳에 머물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