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다듬기
[작은책방 우리책들] 가시 소년(2023, 천개의 바람)
‘페르소나’란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사회적 요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표출하는 공적인 얼굴을 뜻한다. 특히,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이 ‘페르소나’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진정한 나를 숨기고 싶을 때의 방패가 되어주기도 하고, 사회적인 상황에서 내가 아닌 무엇-스럽게 굴어야 할 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페르소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또 해체되기도 한다. 권자경 작가가 글을 쓰고 하완 작가가 그림을 그린 ‘가시 소년’(2023, 천개의 바람)은 분노로 가득찬 ‘나’의 변화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담은 이야기다.
가시 소년은 항상 뾰족하다. 입에선 못된 말과 같은 뾰족한 가시가 마구 튀어나와서 함부로 ‘나’를 건드리면 가시에 찔려 울게 된다. 가시는 매일 자라난다.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들을 때, 싫어하는 반찬과 함께 밥을 먹을 때, 학교에서 공부를 잔뜩 해야 할 때, 초록불인데 횡단보도를 가로질러가는 차를 볼 때, 화는 점점 더 쌓이고 가시는 점점 더 자라난다. 선생님께 혼날 때도, 아이들에게 놀림 받을 때도, 부모님이 싸울 때도.
누구에게나 가시는 있어
나는 가장 크고 날카로운 가시를 가질거야
모두 나를 무서워하게 될 테니까
가시를 곤두세우면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아
‘가시 소년’ 중에서.
가시 소년이 바라보는 세계는 모두에게 가시가 있는 세계다. 그러나 그들은 평온한 얼굴을 한 채, 그림자에는 드러나고 마는 자신의 가시를 없는 셈 친다. 가시 소년은 그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도 더 날카로운 가시를 가져 자신을 보호하고자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가시를 가진 보호는 외롭다. ‘나와 말하려는 사람도 없’고, ‘내가 먼저 다가갈 수도 없’다. ‘혼자 있는 건 눈물이 나는 일’이고 말이다. 그래서 가시 소년은 생각하게 된다.
가시가 없다면 나도 웃을 수 있을까?
활짝 웃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나랑 놀자
나를 안아주세요
나는 너를 좋아해
‘가시 소년’ 중에서.
치과에 찾아간 가시 소년은 자신을 온통 뒤덮고 있던 가시들을 걷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하고 싶은 말들 대신 날카로운 말들을 뱉어내게 만들었던 가시들이 전부 떨어져나가고, 이제 그냥 소년이 된 그는 수줍게 웃는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 손을 들며 인사하는 가시 소년의 발 밑으로 여전히 가시가 가득한 그림자가 보여진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타인과 잘 지낼 수 있는 페르소나를 얻었으나 속내의 분노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조금 슬프기도 하면서,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페르소나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잠시 나의 욕구를 미뤄두는 장치일 것이다. 내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화가 났더라도, 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보여주고 마음을 풀어내기 전까지는 손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한 채 참아보는 것. ‘나’는 단순히 가시를 벗어내고 ‘착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시를 숨겨두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가시 소년’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사회화’라는 행위의 양면을 전부 보여주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문의 062-954-9420
호수(동네책방 ‘숨’ 책방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