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청백리 재상의 전형 소하(蕭何)(4)

‘소하가 만들고 조참이 따랐다’

2025-08-27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소하는 평생을 최고 권력자에서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런 멸사봉공 때문에 한나라 정권은 병목위기를 넘기고 안정을 찾았다. 특히 조참처럼 소하의 심경을 잘 헤아린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았다. 조참의 상이다.

 소하가 한신을 알아보았듯이 소하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소하는 개국 후에도 초대 승상을 맡아 10년 넘게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소하가 중병이 들어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려는 때의 일이었다. 혜제(惠帝) 2년인 기원전 193년이었다. 사마천은 이 이야기를 또 다른 공신인 조참(曹參, ?~기원전 190)의 전기인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 기록했는데 음미할만한 대목이다.

 임종을 앞두고 소하는 혜제에게 자신을 이어 재상을 맡을 사람으로 조참 단 한 사람을 추천했다. 조참은 재상이 되었고, 생전에 소하가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 했다. 소하가 만든 법률도 하나 바꾸지 않고 완전히 지켜나갔다.

 소하를 알아 본 사람

 조참의 아들 조줄(曹○)은 중대부(中大夫)를 맡고 있었다. 황제는 조참이 조정의 일은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조 상국(당시 재상을 부르던 이름)이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혜제는 아들 조줄에게 이렇게 일렀다.

 “집으로 돌아가거든 틈을 봐서 아버지께 ‘고조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얼마 되지 않고 지금 황상은 젊기 때문에 군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시각을 다투어야 할 정도로 급하고 큰일이거늘 상국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계신 분이 하루 종일 술만 마시며 군왕을 만나지도 않고 정사를 처리하지도 않고 있으니 그러고도 상국이라는 중직을 맡으실 수 있냐?’고 여쭤보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내가 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휴가를 받은 조줄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 조참을 모실 기회를 이용하여 황제가 한 말대로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조참은 벼락 같이 화를 내면서 사람을 시켜 아들에게 곤장을 치게 하고는 “빨리 궁으로 돌아가서 황제를 모셔라. 너는 아직 천하의 일을 논할 자격이 없느니라!”라며 아들을 궁으로 돌려보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혜제는 조참이 입조하자 “어째서 아들을 그렇게 야단치셨소. 실은 내가 그에게 시켜서 한 말인데”라며 조참을 나무랐다. 조참은 황급히 관모를 벗고 무릎을 꿇은 다음 황제에게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폐하의 영명하심을 고조 황제와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어찌 선제와 비교될 수 있겠소!”

 “그럼 전임 재상 소하와 저는 누가 더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그야 소 상국이 낫지요.”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고조 황제와 소하는 함께 천하를 평정하셨고, 그 분들이 만든 법령은 아주 분명하고 깨끗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뒷짐만 지고 계시면 되고, 저는 그 법령들을 어기지 않고 그저 제 자리만 잘 지키면 천하가 태평할 것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오!”

소하의 사당에 모셔져 있는 소하의 상이다.

 정치와 정책에는 적절한 방법과 전략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잘못된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거나 없애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전의 좋은 제도와 법은 바꾸지 않고 잘 지키는 것이다. 이는 통치방식이자 통치를 이끄는 주요한 사상이기도 하다. 조참은 소하가 만들어 놓은 간명한 법과 질서를 투명하고 조용하게 지키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안심시켰다. 물론 상황에 따라 조참의 처신은 복지부동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상황파악의 능력이다.

 권력이 교체되고, 자리만 바뀌면 지난 규정이나 정책들을 살피려고도 않고 무조건 폐기처분하고 다시 만드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들이 너무 많다. ‘소하가 만들고 조참이 따랐다’는 이 ‘소규조수(蕭規曹隨)’의 고사는 이런 점에서 먼 앞을 내다보고 제대로 만든 법과 정책이 내는 효과를 새삼 확인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참은 3년을 일하고 기원전 190년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 시호를 의후(懿侯)라 했고 아들 조줄(曹○)이 후(侯)의 작위를 이었다. 백성들은 조참의 공적을 다음과 같은 노래로 칭송했다.

 소하가 법을 만드니

 분명하고 반듯했네.

 조참이 그를 이어

 지키고 바꾸지 않았네.

 맑고 차분하게 떠받드니

 인민이 하나 같이 평안하네.

 위 노래에서 ‘소하가 법을 만드니 분명하고 반듯했네’라는 ‘소하위법(蕭何爲法), 강약획일(○若劃一)’이란 구절에서 ‘획일지법(劃一之法)’이라는 성어가 파생되었다. 한결 같은 법이란 뜻으로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모두가 준수해야 하는 법령이나 정책을 가리키기에 이르렀다.

 사실 소하와 조참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정치적 견해도 달랐고, 업무 스타일도 거의 정반대였다. 당시 지방에 있던 조참은 소하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는 측근들에게 도성으로 올라가야겠다며 짐을 싸게 했다. 조참은 소하가 자신을 후임으로 추천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소하 역시 자신이 다져 놓은 정권과 정책을 흔들지 지켜나갈 인물로는 조참이 적임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정말이지 정치적 감각이란 면에서 진정한 고수들이었다. 소하를 알아 본 조참이었고, 조참을 알아 본 소하였다.

 사마천의 평가

 사마천은 소하의 전기인 <소상국세가> 말미에다 아래와 같은 자신의 논평을 남겼다.

 “상국 소하는 진나라 때 도필리(刀筆吏)로서 무슨 특별한 행적 없이 평범했다. 한이 일어나자 해와 달의 후광에 힘입어 소하는 ‘삼가 열쇠와 자물통을 잘 지켰고’, 진나라 법에 고통 받는 인민들을 위해 순리에 따라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회음후(한신)와 경포 등이 죽임을 당한 뒤 소하의 공적은 더욱 더 빛나게 드러났다. 그 지위는 신하들 중 으뜸이었고 명성은 후대에게까지 전해지니 굉요(○夭)나 산의생(散宜生) 등의 공적에 비할 만하다.”

 사마천은 한의 건국에 소하의 역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여 주 문왕을 보좌했던 굉요와 산의생에 비교했다. 사마천이 말한 ‘열쇠와 자물통을 잘 지켰다’는 ‘근수관약(勤守管○)’은 그 후 나라 살림을 잘 돌보았다는 뜻의 성어가 되었다.

 사마천은 도필리에 지나지 않았던 소하가 유방을 만나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았고, 그 후 가혹한 법에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을 새로운 정책으로 잘 이끌었다고 했다. 이는 소하의 일생과 업적을 적절하게 압축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이제 청백리로서 소하의 모습을 살펴보자.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