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보랏빛 융단 ‘장관’
[김영선 박사의 남도 풀꽃나무] (81) 남도 숲길에 보랏빛 향기, 맥문동 맥(麥) 보리, 문동(門冬)이 ‘겨울을 지킨다’는 뜻
한여름의 끝자락, 남도의 숲길을 걷다 보면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 보랏빛 융단이 드리워진 듯한 장관을 만난다. 바로 8월에서 9월 사이 절정을 이루는 여름 풀꽃, 맥문동(麥門冬)이다.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는 수수하지만, 무리지어 만개한 연보랏빛 군락은 숲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광주광역시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숲길이나 서울 국회의사당 앞 가로수 밑에서도 동시에 피어난 맥문동은 도심 속 그늘을 은은히 물들이며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늦여름 숲의 나른함을 깨우는 이 보랏빛 향연은, 우리 풍경 속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빼어난 한 장면이다.
맥문동은 한자 의미인 맥(麥)이 보리, 문동(門冬)이 ‘겨울을 지킨다’는 뜻이다. 뿌리의 생김새가 보리를 닮았고, 겨울에도 푸른 생명력을 이어가며 사람들의 ‘맥’을 살려주는 약효가 있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뿌리 모양이 보리 뿌리와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 “맥문동”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땅속에서 튼튼한 뿌리가 사람과 자연에 이로움을 준다. 보통 향토명으로는 알꽃맥문동, 넓은잎맥문동이라고도 부른다.
맥문동의 생태적 특징은 백합과에 속하는 관속식물이다. 그늘지고 물기가 많은 숲속이나 산기슭에 자라는 상록성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고 푸르게 남아 있어 숲속에서 쉽게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식물이다. 뿌리줄기는 짧고 굵으며, 굵은 수염뿌리가 많고 기는줄기는 없다. 잎은 뿌리에서 모여 나며, 윤기가 난다. 꽃은 5~8월 잎 사이에서 꽃줄기 위쪽으로 촘촘히 달리며 연한 분홍색이다.
초여름부터 이삭 모양의 꽃대가 올라와 자주색 꽃망울들이 촘촘히 피어나기 시작하며, 남도의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8~9월경엔 꽃이 만개하여 절정을 이룬다. 열매는 둥글고, 7~8월에 검게 익는다.
유사종으로는 기는줄기가 긴 개맥문동, 잎이 짧아 ‘소엽맥문동’이라 불리는 왜란이 있어 혼동하기 쉽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나며 중국, 일본, 타이완 등에 분포한다.
맥문동은 예로부터 우리 땅에 내려온 토종식물로서, 특별한 관리가 없어도 잘 자라는 강인함 덕분에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친숙하게 어울려 살아왔다. 이러한 맥문동의 강인함과 유용성은 현대의 조경 공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맥문동은 추위나 무더위는 물론 한동안 비가 오지 않는 가뭄에도 쉽게 죽지 않고 견뎌내며, 빽빽한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공해에도 비교적 강하고 척박한 토양도 가리지 않는 터라, 도심 속 가로수 밑이나 화단, 공원 등 어디에서나 잘 적응한다.
실제로 잔디가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 나무 그늘진 공간에는 으레 맥문동이 심겨 있는데, 사시사철 푸른 잎과 계절마다 피는 꽃 덕분에 녹지 경관을 유지하는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다. 꽃이 피어 있는 기간도 긴 편이고 진한 자줏빛 색감이 돋보여 관상 가치가 높고, 꽃이 진 후 맺히는 까만 열매도 보는 즐거움을 준다.
무엇보다 맥문동은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토종 식물로서 수천 년간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에 적응해온 덕분에,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도 끈질기게 버텨내며 숲을 지탱한다. 거센 비바람에 큰 나무가 쓰러져도 땅속 뿌리는 남아 싹을 틔우고, 숲 바닥을 다시 덮어 토양 유실을 막는다.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별도의 관리 없이도 도시와 농촌의 녹지를 안정적으로 지켜주는 존재다. 작은 풀 한 포기가 주변 환경을 지키고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선사한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 아니라 고마운 일이다.
남도의 여름 숲길을 보랏빛으로 수놓는 맥문동은 자연의 지혜와 희망을 전해준다. 한껏 뜨거운 계절을 지나 다시 그늘 아래에서 피어나는 풀꽃처럼, 우리 삶에도 고비 뒤에 찾아오는 회복의 시간이 있다. 토종 식물 맥문동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주변의 토착 식물을 지키고 보살필 때,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광주 군공항 종전부지가 아파트 개발 대신 ‘백만평광주숲’으로 거듭난다면, 맥문동과 그 유사한 풀꽃들이 숲 바닥을 덮어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시민들에게 시원한 위안을 선사할 것이다. 맥문동, 작은 풀 한 포기의 강인함과 겸손한 아름다움 속에서, 기후위기 시대를 헤쳐 나갈 지속 가능한 공존의 해법을 배운다.
△참고 문헌
https://species.nibr.go.kr/index.do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http://www.nature.go.kr/kpni/index.do/ 국가표준식물목록
김영선
환경생태학 박사
광주전남녹색연합 상임대표
코리아생태연구소 부소장
부산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