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이 빚어낸 쓰시마의 풍경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쓰시마 섬 이야기 두 번째

2025-09-05     전고필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본 아소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다로 도리이(일본 신사 입구에 세워진 기둥문. 신성한 공간과 일반 세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 역할을 한다)가 묻혀있는 와타즈미 신사였다. 일본인들에게 신사는 그들의 뿌리와 같은 것으로 신토라고 하는 일본 고유 종교의 사당 개념으로 신사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신사 마당에 두 개, 바다를 향한 곳에 하나 그리고 바닷속에 두 개의 도리이가 있는 풍경은 낯선 이국에 내가 와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20여년 전에 일본관광 포스터에 도리이에 기대선 여성의 스틸 컷이 마치 ‘그 섬에 가고 싶다’ 라는 자극제로 보였던 기억났다. 신사의 경내로는 걸음 하지 못했다. 그냥 밖에서 둘러만 보고 나왔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쓰시마에서 한국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곳으로 아타즈미 신사와 면암 최익현 선생의 비를 가지고 있는 수선사가 있다고 한다. 늘 그렇듯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적대적 감정과 한편으로는 이웃나라로서 선린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양가적 감정이 공존하는 탓이다. 격해진 한국관광객이 이곳에 와서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 일에서 빗장이 걸어진 것 아닌가 싶어졌다.

 나의 출장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없이 미래만 도모하는 것이라면 허망한 일이고, 그렇다고 그것에 얽매여 멍하니 있는 것도 아니될 일이기에 짐짓 신경이 곤두서는 일정이기도 했다. 도리이는 우리로 치면 능이나, 향교, 서원에 들어설 때 만나는 홍살문과 같은 상징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속과 성, 즉 삿된 공간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서는 전이공간의 상징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육지의 도리이, 바닷가의 도리이, 바닷속의 도리이 그 자체가 이곳과 저곳 즉, 삶의 기저와 삶 너머의 세상 등을 구분하는 경계와 같아 보였다.

 일본인들의 종교체계를 알지 못하지만 이들의 신화나 서사 또한 제주의 본향당의 이야기와 닮은 부분도 있었고, 또 기묘한 전개가 이뤄지는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여겨지는 우리 생각을 뛰어넘어 그들에게는 일상이 신격화 되어 신사에 모셔지는 일들도 많았다.

 드림투데이에 연재하는 강은영 교수가 800만 명의 신을 가진 일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능히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곁눈질로만 신사의 본당을 보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오른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화마을 자연공원이 멈췄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런 시설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안내도를 보니 우리로 치면 산림청에서 만난 자연휴양림과 같은 시설이었다. 쓰시마 사람들과 한국인 관광객이 주로 이용하며 숲속에서 가족들이나 동료들간의 힐링 시간을 갖는데 적격이라고 했다. 하긴 곳곳이 삼나무로 빼곡하니 피톤치드로 육신과 영혼 모두가 정결하게 될 듯 싶었다.

인공으로 뚫은 만제키바시해협.

 에보시다케 전망대서 본 아소만 풍경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쓰시마를 이루는 해안경관이 360도로 보이는 에보시다케 전망대를 찾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느릿하게 차로 오르면서 그야말로 삼나무림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몇백년은 이 나무를 활용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데, 이제 일본 본섬이나 이곳 쓰시마 또한 고령화와 도시 종속화 등으로 그냥 방치되어 가는 것이 부지기수란 것이 아쉽다.

 이런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누군들 예측했던가 싶어지는 순간 우리는 아소만의 정경이 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쓰시마섬 전체의 남쪽으로부터 2/1 약간 못미치는 곳에 위치한 전망대는 바다를 향해 달리던 산이 바위 단애와 협곡을 형성하고 그 사이로 바다가 흐르는 독특한 피오르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다도해와 같은 풍광이면서 마치 여수와 돌산도 사이를 항해하는 듯한 곳들이 산개한 지역이었다.

 그렇게 쓰시마를 이루는 중심지의 아소만 풍경을 보고 다시 우리를 태운 차량은 만제키바시 다리로 나아갔다. 인공으로 뚫어 뱃길을 만들었다. 이 바닷길이 없다면 배들은 먼 길을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을 산허리를 잘라내고 해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철제 다리와 전망대를 놓았는데, 나는 마치 통영대교에 있는 듯한 착시를 했다. 전망대 곁에는 쓰시마 고유의 건축양식이 드러나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강원도 삼척이나 동해쪽에서 보았던 굴피집과 유사하게 보여 가까이 가보니 재료가 돌이었다. 참나무의 껍질로 기와처럼 이어서 지붕을 만든 우리와 달리 여기에서는 판자처럼 생긴 돌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아무리 판석이 흔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거운 지붕돌을 만드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법 했다. 이를테면 제주의 지붕이 낮은 이유가 바람과 태풍 때문에 지붕이 홀라당 날라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함처럼 말이다.

 스스로 추론해 보면서 그게 맞을 것 같다고 부추겨 봤다. 곁에 있던 부산문화재단의 팀장이 이 가옥을 이시야네라고 하고 한자로는 石屋根 이라고 쓴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고보니 오전 와니우라에서 오는 길에 창고건물로 쓰였다는 곳의 지붕이 다 이런 모양새였다.

돌널판으로 지붕을 이어 '이시야네'라고 부르는 쓰시마 고유의 건축.

 만제키바시 다리와 돌지붕 집 이시야네

 거기서 사진을 찍을터인데 싶은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여행이 그곳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닿아야 하는데, 그저 주마간산처럼 스쳐 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나 자신도 그렇게 게을러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것으로 오늘 투어 여정은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두시간 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서 호텔의 밖을 보니 어린이들이 가마를 들고 행렬을 하고 있다. 이즈하라항구축제의 퍼레이드중 일부일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 공식 스케쥴을 준비한다. 여섯시 쓰시마시장 주최의 환영만찬회가 있다. 호텔 로비에서 일행과 만나 행사장으로 갔다. 지난번 부산에서 인사 드렸지만 아직 영암을 기억하지는 못할 터이니 확실하게 또 인사를 해야 했다. 다소 긴장하긴 했지만 워낙에 한국과 부산을 잘 아시는 분이고, 또 부산재단 식구들과 친밀하니 스스로 마음을 풀어 놓자고 하고 자리에 착석했다.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사와 내빈인사를 거치고 이번 조선통신사 행렬의 정사와 부사, 쓰시마번주 등 주요 참가자 인사가 있었다.

이즈하라항구축제 불꽃놀이.

 영암재단 대표 인사와 교류의 장

 그런 다음 마침내 영암재단의 대표로 소개 할 차례를 받았다. “영암은 전라남도라는 곳의 서남해안으로 고대 해양항로의 중심에 있던 도시입니다. 왕인박사의 발신기지가 바로 영암입니다. 여러분들이 대대로 쌓아오신 선린과 교류의 정신을 배우고 우리 영암재단도 실천하고자 부산재단의 협조를 받아 여기왔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다.

 식사와 환담의 자리에서 이곳의 영사님도 뵙고, 지역문화활동가도 뵙고, 쓰시마박물관 관장님 등을 비롯해 여러분들과 의미있는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조선통신상연지연락협의회의 명예이사장인 마츠바라 카즈유키 상이 마련한 교류회 시간이다. 이즈하라항에 있는 본인 소유의 대주해운 회사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참석자 인사를 하고 모두 자리에서 환담을 즐긴다. 내 테이블쪽으로는 쓰시마에 계시는 한인분들이 자주 오셨다. 그중에 우연히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지도교수에게 공부를 한 동문을 만나기도 했다. 참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9시 즈음에서 항구를 가득 밝히는 불꽃놀이가 30여분간 지속되었다. 일본의 최변방인 쓰시마에서 지역주민들에게 섬의 정체성과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진행된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불꽃놀이와 조신통신사 행렬에서 정점을 찍는다고 했다. 전망 좋은 곳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축포 한발에 축배 한잔을 하며 쓰시마의 첫 밤이 저물어 갔다.

통신사가 지나간 경유지를 안내하는 전시물.

 쓰시마박물관에서 본 조선통신사 특별전

 둘째날의 일정은 아침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쓰시마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장은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 이사장을 겸직하는 마츠다 카즈토 상이었다. 한국 나이로 71세인데 여전한 현역이었다. 쓰시마의 역사유적과 자연 생태를 전시하는 전시시설과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 특별전을 관람하고 가네이시성과 연접한 지점에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를 찾아보았다.

 이제 조선통신사만의 역사를 특별하게 전시하는 역사민속자료관을 방문하여 1607년을 기점으로 1811년까지 12차례 쓰시마를 첫 기착지로 하여 일본 본토까지 찾아간 내력을 소상히 볼 수 있었다. 11대 정사로 파견되신 분의 이름이 낯익다. 조엄. 쓰시마의 고구마를 조선으로 들여온 분이다. 1763년 처음 봤을 때 구황작물로 더없이 좋을 것이라 여겨 특별선으로 부산진에 보냈지만 재배에 실패했고, 사신단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고구마를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주어 그의 동생 강필교와 함께 재배에 성공하며 마침내 조선땅에 번져간 것이다. 처음 부르는 이름은 고귀위마라고 하다 고금아, 고구마로 이렇게 이름이 굳어진 것이 오늘날 영암땅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고구마가 된 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공간을 찾다보면 그곳에 내 지역과 연관된 자취들이 드러나 보이는 경우가 많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의 행렬도 일부-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본토와의 가교역할을 했던 곳이다.

 역사 속 연결고리와 비교문화의 시선

 이런 부분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류학이나 민속학, 그리고 비교문화 등의 학문의 범주다. 왕인항구라고 불리는 와니우라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내가 일하는 곳인 영암과 쓰시마와의 접점을 형성할 수 있는 또 새로운 매개체 고구마가 내게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제 다시 쓰시마시장님 주최의 오찬을 하고 진짜 메인 행사인 조선통신사 행렬속으로 빠져들어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