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겐 긍정적 변화 가능성이 있다
[광주 퀴어 동사무소 에세이]
성소수자는 여기에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연재는 광주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조명합니다.
연재의 타이틀인 ‘퀴어 동사무소’는 퀴어 시민이 지역사회에서 ‘보이는 존재’로 자리 잡고,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기록하고 돌보는 공공 공간을 상상하는 의미입니다. 성소수자들은 단순한 정체성 이상의 존재이며, 다양한 차별과 연대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이 에세이들이 누군가에겐 용기와 위로가, 또 누군가에겐 이해와 변화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성차별이 싫어서 한국을 떠났는데, 거긴 성차별에 인종차별까지 있었다. 처음 들은 말은 “하룻밤에 얼마냐”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내게 “독일 남자랑 결혼하려고 왔냐?”라고도 물었다. “응 나도 취향이란 게 있단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때때로 난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었고, 침을 맞고, 조리돌리듯 둘러싸이기도 하고, 아무 뜻도 없는 ‘칭챙총’을 들었다. 그러다 독일어를 배우면서 나는 싸움꾼이 되었다. 그냥 흘렸을 말들이 귀에 걸리고, 무례하고 불의한 말에 독일어로 받아쳐야 그날 저녁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가는 길이었다. 전철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뒤에 오는 젊은 남성 무리 중 하나가 내게 “니하오” 했다. 돌아서서 “뭐라고?” 그랬더니, 그들은 낄낄거리며 그냥 지나쳤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들을 다시 마주쳤고, 나는 다가가 물었다.
“너 아까 뭐라고 했어?”
“야, 너. 아까 뭐라고 했냐고?”
“뭐라고 안 했는데.”
“니하오라고 했지.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냐니? 인사잖아.”
“그게 인사인지 나는 모르겠고. 너 진짜 나랑 인사하고 싶었어?”
“…”
“네가 하는 행동이 인종차별적이라는 거 알지?”
“(발끈해서) 내가 왜 인종차별주의자야?”
“넌 내가 그냥 아시아인이라고 보이니까 아무 말이나 던진 거잖아. 그건 무례하고 차별적인 행동이야.”
“아닌데, 그냥 장난이었는데.”
“나한텐 장난 아니고, 이건 인종차별적인 거라고.”
“아니라고.”
실랑이하는 동안 버스가 왔다. 그들은 나와 같은 버스를 타려 했다. 순간 나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한 행동은 인종차별적이고, 나는 너희랑 같은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아. 타지 마.”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버스에 오르려 했다. 나는 더 크게 소리쳤다. “타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자, 그들은 민망했는지 결국 정류장에 남았다. 곧 버스는 출발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길에서 나를 스쳐 지나가며 “중국으로 꺼져” “제길, 아시아인들”이라고 내뱉던 자들에 “야, 방금 뭐라고 했어?”라고 되물으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조용한 아시아인들이 소리를 낼 거라고는 예상을 못 한 거다. 그들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이란 게 있을까? 있는 것이라곤 비겁한 수치심뿐일 거다.
얼마 전, 지하철 안이었다. 양동시장역에서 이주 여성 셋이 양 손에 짐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친구들인지, 자매들인지, 함께 장을 보고 돌아가는 듯했다. 모어로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타지에서 모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저 멍청이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지.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중년 여성의 표정이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여성들을 보며 “어휴, 정신 나간 것들”이라고 말했다. 내 귀를 의심하며 그를 노려봤다. 그는 내 시선은 안중에 없고, 이주 여성 셋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신 쯧쯧거리고 있었다.
다음 역에 도착하자 그는 갑자기 여성들을 향해 “조용히 해!” 소리쳤다. 순간 움츠러드는 여성들을 보자 나는 참지 못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더 시끄러워요. 이분들 다 알아들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게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저한테 왜 죄송해요. 사과하려면 이분들한테 하셔야죠.” 그는 황급히 다음 칸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곧 다음 역에서 내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너무 슬퍼서 울었다. 사람은 왜 사람을 업신여길까. 나는 왜 내게 무례했던 독일 남자들을, 이주 여성들에게 무례했던 그 중년 여성을 마음속 깊이 경멸하고 업신여겼을까. 반복되는 차별과 혐오에 내 마음에 사랑이 말라버린 것은 아닐까.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랑으로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우리를 격려하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책을 펼친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스토아학파의 냉소적인 절망이 희망적인 삶보다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품기 전부터 기본적인 수준의 사랑은 필요하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킹이 언급했듯이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 분리하는 일이 이 사랑을 돕는다. 악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다.”-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p.266
우리에게 필요한 건, 냉소와 비난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는 완벽한 정의(正義) 같은 희망이 아니라, 결점 많은 인간들이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믿음일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광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 회의 때마다 함께 읽는 평등 규칙의 첫 번째 문구가 떠오른다.
“우리는 인권의 주체이며 우리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 약속 앞에서, 앞서 내게 무례했던 독일 남자들에게 했던 “그들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있는 것이라곤 비겁한 수치심뿐일 거다”라는 말을 철회한다.
손어진(광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광주녹색당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