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청백리(淸白吏) 열전] 청백리 재상의 전형 소하(蕭何)(5)

1인자’가 가장 얻고 싶어하는 ‘2인자’

2025-09-10     김영수

 공직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나라 잘 되는 데는 열 충신으로도 모자라지만 나라 망치는 것은 혼군(昏君)이나 간신(奸臣) 하나면 충분하다’는 옛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체제를 벗어난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때보다 못한 일들이 나라와 공직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국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길 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난국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성찰로서 역대 중국의 청백리들을 소개하여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많은 격려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김영수(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는 지난 30년 넘게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과 그가 남긴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 3천 년 통사 《사기(史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 동안 150차례 이상 중국의 역사 현장을 탐방했으며, 많은 저역서를 출간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 ‘간신 3부작’ 《간신론》 《간신전》 《간신학》,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성공하는 리더의 역사공부》 등이 있다. (편집자주)

고조 유방과 소하(왼쪽), 한신의 석상이다.

 유방은 소하를 깊게 신임했다. 봉기 이전 젊은 날부터 소하의 보살핌을 받았던 유방의 소하에 대한 의지는 남달랐다. 이는 황제가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언급했다시피 소하는 모든 일을 법령에 따라 세심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유방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얻으려 했다. 이런 일처리에 익숙지 않고 또 성격에도 맞지 않았던 유방은 소하에게 ‘알아서 적절하게 처리하라’며 맡겼다. 여기서 ‘편의시행(便宜施行)’이란 표현이 나왔다.

 이후 ‘편의시행’은 리더가 실무를 담당한 사람에게 일일이 보고하거나 결재를 거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위임할 때 쓰는 성어가 되었다. ‘편의종사(便宜從事)’로도 많이 쓴다. ‘편의종사’의 출처는 《한서》 <순리전(循吏傳)>에 수록된 인물 공수(○遂, 생몰 미상) 부분이다.

 유방이 소하를 마음놓고 신임할 수 있었던 데는 소하의 청렴과도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소하는 평생 전전긍긍(戰戰兢兢) 고조 유방을 보좌하며 살았다. 유방은 반란을 진압하러 나간 뒤 계속 사람을 보내 최고 권력자 유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공신에게 내린 땅도 일부러 거친 땅으로 골랐고, 사는 집도 늘 한갓진 곳에 마련했다. 심지어 집 담장도 쌓지 않았다. 그러면서 소하는 식솔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후손이 현명하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못났더라도 권세가에게 빼앗길 일은 없을 것이다.”

 땅이나 집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빼앗길 염려가 없다는 뜻이다. 최고 권력자의 의심도 피하고 후손의 미래까지 생각한 소하의 현명한 처신이었다. 여기서 ‘소하의 집’이란 뜻의 ‘소택(蕭宅)’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재상이 퇴직하여 거처하는 시골의 집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춘추시대 5패의 한 사람으로 위세를 떨쳤던 초나라 장왕(莊王)을 보좌한 재상 손숙오(孫叔敖)도 아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왕이 땅을 내릴 터이니 좋은 땅은 사양하고 거친 땅만 받으라고 유언했다. 소하 역시 손숙오를 본받아 이런 처세로 자신의 청렴함을 지키고 권력자의 의심을 피했다. 현명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청백리로 꼽히는 손숙오와 소하는 모두 현명한 재상이 취해야 할 처세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1인자을 염두에 둔 처신이었고, 이는 1인자의 통치행위를 한결 자유롭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하의 청렴과 처신은 다른 면에서 보자면 강력한(?) 1인자를 모시는 2인자의 비애이자 운명이기도 했다. 강력이란 표현에는 복합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 독단적인 통치, 2인자를 비롯한 권력층에 대해 의심을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리더 등과 같은 요소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특정 정권의 작동 원리, 즉 시스템과 1인자의 통치행위에 반영되는 개성과 특성에 따라 2인자를 비롯한 권력층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소하는 이런 점에서 청렴한 생활을 앞세운 현명한 처신의 전형이었다. 오월쟁패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월나라의 구천을 피해 절정기에 은퇴한 범려의 처신이나, 같은 공신이지만 정권 수립 후 바로 초야로 은퇴한 장량의 처세는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지만 정권, 그것도 막 들어선 초기 정권에 필요한 정권의 안정이란 점에서는 다소 무책임했다는 지적도 가능하지 않을까? 소하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 문제를 끝으로 좀 더 다루어 본다.

소하, 장량.

 ‘서한삼걸(西漢三杰)’의 이미지와 소하

 《사기》 속의 인물들은 아무렇게나 넣은 것이 아니라 세심한 선택이란 과정을 거쳤다. 이 인물들은 생활 속의 본질적 모순을 심각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이 빚어낸 인물들의 이미지는 보편성과 전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서한삼걸을 중심으로 그들이 보여준 처신의 차이, 최후를 짚어본다. 나아가 이를 통해 소하의 처신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유방의 개국공신들 중 출신으로 보자면 대체로 세 계층에서 나왔다.

 첫째는 진나라 정권에서 말단 관리를 지낸 인물들로 소하와 조참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구 귀족 출신들로 장량과 위표가 대표적이다. 셋째는 평민 출신으로 한신과 진평 등이 이에 속한다.

 유방에게 귀순한 경로로 보자면 패현에서 유방을 옹립하여 봉기한 인물들, 도중에 유방에게로 온 인물들, 초나라에서 도망쳐 유방에게로 온 인물들로 나눌 수 있다.

 공신들의 최후를 보면 명성과 자리를 잘 보전한 경우, 공을 이루고 물러난 경우, 숙청당한 경우로 나뉜다.

 소하·장량·한신 이 삼걸은 유방의 개국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특출 나고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삼걸의 모습과 행적이 보여 주는 가장 근본적인 전형성은 그들이 각자 독특한 성격을 통해 한나라 초기 사회생활의 본질적인 면들을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는데 있다.

 장량은 책사로서 뛰어난 책략과 냉철한 지혜로 공을 이룬 다음 은퇴한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소하는 재상으로서 침착하고 노련하게 몸을 굽혀가며 있는 힘을 다해 유방을 보좌하여 그 명성과 자리를 보전한 점이 특별나다. 한신은 대장군으로서 100만 대군을 이끌며 싸웠다 하면 승리하고 공격했다하면 반드시 취하는 군사상의 천재성으로 천하 패권의 행방을 좌우했으나 서툰 처세 등과 같은 개성과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기문학에서 한 인물의 전형화는 역사와 시대의 눈높이에 발을 맞추어 특정한 사회환경과 시대의 맥박을 파악하여 그 인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토양과 그 인물의 성격을 제약하는 환경 등을 제대로 짚어내야 한다.

 《사기》는 당시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한 왕조의 건립을 전환점으로 삼아 전후 두 단계를 나누고 있다. 앞 단계의 주된 모순점은 초·한 양대 집단의 모순이다. 유방은 전력을 다해 주적인 항우를 상대했고, 삼걸은 이를 위해 모두 자신들의 큰 뜻과 책략을 펼쳐 보였다. 초·한 쟁패기가 마무리되면서 주된 모순은 유방의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즉 창업 과정에는 감추어져 있던 이 모순이 느슨한 상태에서 상황이 변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런 형세 변화는 삼걸로 하여금 주의력을 전략이 아닌 권모술수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고, 결국 세 개의 개성이 세 개의 서로 다른 결말을 만들어냈다. 지혜로운 장량은 인간사를 버리길 원한다면서 주동적으로 세상을 피했다. 소하는 보기에는 잘 마무리된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아와 인격을 훼손시켜야만 했던 굴욕이 침통함 속에 숨어 있다.

 사마천은 삼걸의 운명과 조우를 통해 한나라 초기 군신관계의 실질을 생생하게 반영했다. 공신으로 봉해지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 이것이 당시 공신들의 운명이자 비극이자 시대의 비극이었다. 시대의 조류가 그들을 만들었지만 그들의 운명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삼걸 형상의 전형성이 갖는 의미는 그들이 살았던 그 사회 환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늘 노심초사(勞心焦思) 전전긍긍(戰戰兢兢)

 이제 소하로 초점을 옮겨 보자. 소하가 알아 본 인물로는 유방이 단연 으뜸이다. 봉기 때 유방을 설득하여 우두머리로 앞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소하였다. 당시 유방은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랫동안 유방을 보아 온 소하의 눈에는 유방이 아니면 봉기를 이끌 사람이 없었다. 누구보다 유방을 잘 알고 있었던 소하였다.

 창업 이후 소하의 처신을 보면, 그가 유방의 기질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량의 은퇴와 한신의 죽음을 보면서도 그는 유방의 곁을 지켰다. 1등 공신으로 다른 공신들과는 다른 우대를 받는 2인자였지만 그는 이를 결코 티내지 않았다. 늘 노심초사(勞心焦思), 전전긍긍(戰戰兢兢)이었다. 좋은 정책과 행정으로 민심을 한껏 얻고 있는 소하에 대해 유방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이를 안 소하는 일부터 백성들을 괴롭혀 민심을 잃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소하의 이런 처신은 얼핏 자리 보전에 급급한 궁색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자리보전을 위한 처신이 결코 아니었다. 소하가 그저 부귀영화와 자리 때문에 2인자의 눈치를 보았다면 그의 처신은 유방에게 오로지 아부하고 비위만 맞추었을 것이다. 또 청렴하게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가능한 부귀를 누리려 했을 것이고, 이는 또 얼마든지 가능했다. 또 자신의 후임으로 자신과 후손들의 부귀를 지켜 줄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소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고, 정권 초기에 필요한 일들을 훌륭히 해냈다. 청렴함도 지켰다. 관료사회에서 청렴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1차적으로는 관료 개인의 품성과 관련이 있지만, 공직에 대한 자세와 인식에 맞추어 청렴함을 지키거나, 공직사회의 기풍과 제도 청렴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청렴을 지킨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를 수는 없다. 소하는 무엇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바꾸지 않고 지킬 후임자로 자신과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사이도 좋지 않았던 조참을 추천하는 귀중한 공사분별의 자세까지 보여주었다. 이렇듯 소하가 보여준 이런 행적들은 2인자의 바람직한 처신을 비롯하여 1인자가 가장 얻고 싶어 하는 2인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에서 소하는 1인자의 리더십에만 치우쳐 있는 리더십 관련 논의에서 바람직한 ‘2인자의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지고 있다.

 김영수 사마천학회 이사장

 본문 한자 속 ‘○’표시는 신문제작시스템에 없는 글자임을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