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으면 부처’ 조계종 종가집 품은 산
[김희순의 호남의 명산] 장흥 가지산(510m) 불국사보다 더 많은 문화재·약수와 비자림 ‘보물 숲’
“가지산의 ‘가지(迦智)’는 ‘모든 생명은 본래 부처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석가모니의 지혜다’”라고 보림사에 주석했던 일선(日禪) 주지는 주장한다. 해발 510m에 불과한 장흥 가지산(迦智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남쪽 계곡에 깊숙이 자리 잡은 보림사(寶林寺)의 위상 때문이다. 지금은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전락해 옛 영화는 간데없지만, 보림사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천년 고찰로서 선종(禪宗)을 태동한 절이다. 초기 신라시대의 불교는 다섯 종파가 경전을 중요시하는 귀족불교였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 당나라 유학파들은 참선과 깨달음으로 성불하는 선종사상을 외쳤다. 이는 중인 계급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보림사는 선종의 9개 산문(山門) 가운데 최초 문파인 가지산(迦智山派)의 중심이 되었다.
장흥 가지산과 마찬가지로 영남 알프스에 있는 가지산(1204m)도 한자 이름이 똑같다. 지리적 거리는 멀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는 것은 도의(道義)국사가 있어서다. 도의국사는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의 아홉 개 파)을 열었고, 이어서 영남알프스 가지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를 창건했다.
보림사 전체가 노천 역사박물관
가지산은 봉미산(505.8m) 곰재, 피재, 제암산(778.5m)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에서 살짝 비켜있고 정상부의 암릉지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육산에 가깝다. 산의 형세로만 본다면 규모가 작고 특이하게 내세울 것은 없지만 보림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약수는 ‘한국의 명수’ 대접을 받는다. 절 관계자는 대웅보전 뒤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150년~300년 수령의 비자나무가 약수 맛에 영향을 준다고도 말한다. 신기하게도 약수터는 사방이 막혀있지만 물고기와 다슬기가 살고 있다.
조계종 ‘종갓집’ 격인 보림사의 첫인상은 온기가 없고 적막하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각이 불에 타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큰 마당이 더욱 비어 보인다. 하지만 보림사는 ‘보물의 숲’이다. 보유 문화재로만 치자면 경주 불국사(국보 3점, 보물 5점, 도 유형문화재 1점)보다 더 많은 총 23점(국보 2점, 보물 8점, 도 유형문화재 13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보물 1254호 목조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 중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사천왕상 제작의 표준이 될 정도다.
원래 보림사 경내에서 부도밭으로 연결되는 탐방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서 좌측으로 200m 거리에 산행개념도와 이정표가 있다. 3ha에 이르는 비자림 산림욕장이 있다는 안내문도 보인다. 들머리격인 ‘부도밭’은 동부도 보물 제155호를 비롯한 5~6기의 귀중한 문화재가 허술하게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굵직한 비자나무 아래에는 야생차가 함께 자라고 있다. 5분 정도 지긋하게 오르면 이정표는 ‘정상1.1km'를 가리킨다. 굴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좁은 오솔길을 5분 더 가야 약수터다.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왼쪽 언덕에 ‘전망대’ 모정이 있으나 조망은 신통치 않다.
망원석(望遠石)은 촛대처럼 우뚝 솟은 5m 높이의 바위로, 남근석 모양이다. 스님들이 도를 닦던 곳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시야가 뚫리며 병무산, 제암산 능선이 너울처럼 보인다. 계속 오르막이 이어지는 곳에 ‘공주 이씨’ 묘 보호를 위한 붉은 벽돌 담장을 지나고 나면 갈림길 삼거리다. 이정표는 ‘정상 0.5km’ 이곳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고 점판암 계열의 잡석들이 나무뿌리와 뒤엉켜있어 길이 사납다. 20여 분 숨차게 오르다가 바위들이 널부러진 곳을 지나면 닭 벼슬처럼 날카로운 4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진 암릉에 서게 된다.
정상석 위치에 대해 약간의 혼동이 있다. 장흥군에서 설치한 정상석은 ‘가지산 509.9m’로 되어 있고 정맥꾼들이 정상으로 인정하는 상봉에도 ‘가지산 정상(삼개봉) 515m’ 안내판이 있어 혼란스럽다. 설상가상으로 삼각점도 보이지 않지만 1:25000 지도와 GPS를 기준으로 해 1봉, 2봉, 3봉, 상봉 4개로 구분하고 북쪽 끝에 위치한 상봉(510m)이 정상이 된다.
정상은 네 봉우리 중 상봉이 되어야
상봉에 올라서면 ‘일망무제’란 단어를 실감케 한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어 북쪽으로 화학산을 비롯해 월출산과 수인산 남쪽으로는 제암산 등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날이 좋으면 지리산 천왕봉까지도 보인다. 비슷한 높이의 4개의 봉우리는 상당히 가파르고 고도감이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현재의 정상 표지가 있는 곳에서 상봉까지는 10분이면 다녀 올 수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온통 굴참나무 천지다. 9시 방향으로 완만하게 고도가 낮아지고 잡목이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다. 7부 능선까지 백설기를 버무린 것 같은 바위들이 계속 노출돼 있어 걷기에 조심스럽다. 산죽이 무성하고 미로같은 숲길이 이어지지만 적절한 곳에 이정표가 설치되어있어 길 찾기에는 어려움은 없다. 소나무산림욕장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는 벤치와 각종 운동시설이 놓여있어 휴식하기 좋은 공간이다. 왼쪽으로 꺾으면 곧장 보림사로 내려갈 수 있고, ‘학생의 집’ 이정표를 따라가면 도로와 만난다.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원당암’이 있으나 기와 얹은 가정집 분위기가 나는 암자다. 특징이 없는 자갈길 따라 400여m 정도 더 내려가면 820번 지방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보림사까지는 0.8km 더 가야한다. 도로변에는 커다란 화강석에 새긴 ‘인동초민주동지기념비’가 있다. 이 지역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과 관계자가 민주화 의지를 새긴 것이다. 도로변에 있는 약수터를 지나고 이정표에서 바로 왼쪽으로 꺽으면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 대적광전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앞에 있는 보림약수는 늘 넘치지 않고 흐른다. 물 한사발도 마음으로 마셔본다.
▲산행 길잡이
보림사-망원석-삼거리-정상-상봉-소나무산림욕장-지방도로-보림사(6km 3시간 40분)
보림사-망원석-삼거리-정상-상봉-소나무산림욕장-보림사(3.8km 3시간
맛집(지역번호 061)
유치면 주변에는 숙식이 마땅치 않다. 가까운 화순 능주 송원식당(373-9165)은 주차장이 넓고 양념이 잘 배인 돼지갈비(1인분 1만 1000원)로 유명하다. 바로 옆에 있는 전라도식 양지식당(372-1602) 또한 목살 주물럭과 추어탕으로 골퍼들에게 소문이 자자한집이다. 장흥읍내에서는 망설임 없이 한우삼합이다. 장흥군에서 보증하는 한우와 가리비, 표고버섯을 함께 1사람이 2~3만원이면 만족하게 먹을 수 있다. 따로 예약없이 어느 곳에서나 이용가능하다.
글·사진= 김희순 山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