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 고로…] 러닝도 ‘장비빨’
고글·조끼…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 건강을 위한 소비, 소비를 위한 건강?
달리기엔 땀을 잘 흡수하는 옷과 운동화면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러닝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패션과 문화가 결합된 거대한 트렌드가 됐다. 과도한 소비를 부추긴다는 우려 속에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 입은 러너들의 모습은 달리기의 새로운 얼굴을 비춘다.
요즘은 달리기 전에 장비부터 산다. 각종 장비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밀하게 나뉜다. 머리엔 땀을 흡수하고 머리카락을 고정해주는 헤어밴드나 러닝 캡, 눈부심을 막는 스포츠 고글이 기본이다. 상체엔 땀을 빠르게 건조시키는 기능성 티셔츠나 초경량 바람막이, 수분과 에너지 젤을 넣을 수 있는 러닝 베스트가 함께 착용된다.
허리에는 러닝 밴드나 플라스크 물병, 스마트폰을 고정하는 암밴드, 손목에는 스마트 워치가 자리 잡는다. 하체는 레깅스나 조거 팬츠, 충격 흡수를 돕는 무릎 보호대와 라인 삭스, 그리고 가장 핵심인 러닝화로 마무리된다.
특히 러닝화는 기술의 집약체다. 탄성이 뛰어난 카본 플레이트(탄소판)를 넣은 ‘카본화’, 질소를 주입한 ‘질소 충전화’, 방수·투습 기능을 갖춘 고어텍스 러닝화 등이 각광받고 있다. 가격과 성능을 기준으로 브랜드별 운동화 등급을 나눈 ‘러닝화 계급도’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될 정도다.
러닝복은 이제 운동복이 아니라 하나의 패션 스타일이 됐다. ‘러닝코어(Running-core)’라 불리는 트렌드는 기능성과 감각을 동시에 추구한다. 레깅스, 브라톱, 조거 팬츠, 초경량 바람막이 등 러닝 아이템이 일상복으로 확장됐다. 주요 유통업체는 러닝 전용 편집숍을 잇따라 열고 있고, 광주신세계도 이달 ‘러너스 위크’ 기간을 운영하는 등 ‘러닝코어’는 메인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러닝의 인기는 웨어러블 산업 성장으로도 이어졌다. 심박수와 페이스, GPS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스마트워치, 땀으로부터 자유롭고 주변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오픈형 이어폰 등은 이제 러너의 필수품이다. 이처럼 러닝은 운동을 넘어 기술과 패션이 만난 생활 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러닝 인구 1000만 명 시대. 러닝은 여전히 가장 단순하고 접근하기 쉬운 운동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소비 생태계를 만든 산업이기도 하다. 러닝코어 패션, 스마트 기기, 고가의 러닝화까지 달리기를 위한 장비가 점점 고급화·다양화되면서, 일부에서는 “운동보다 소비가 먼저”라는 말도 나온다.
물론 좋은 장비는 부상을 예방하고 운동 효율을 높인다. 그러나 초보 러너에게 중요한 건 비싼 장비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페이스에 맞는 기본기다. 화려한 러닝화보다 자신에게 맞는 한 걸음, 값비싼 워치보다 몸의 신호를 듣는 감각이 우선이다.
결국 러닝의 본질은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을 찾는 일이다. 건강을 위해 달리다 부상을 얻거나, 자유를 위해 뛰다 소비에 얽매이는 일은 그 본질과 멀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유시연 기자 youn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