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처럼, 피라칸사스처럼, 벼처럼

[곰돌곰순의 귀촌일기](118) 가을, 나를 익히다

2025-10-21     백청일, 오숙희

곰돌곰순은 한재골로 바람을 쐬러 가다 대치 마을에 매료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실 성당이랑 농협, 우체국, 파출소, 마트 등을 발견하고는 2018년 여름 이사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당에 작물도 키우고 동네 5일장(3, 8일)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으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고 있다. 지나 보내기 아까운 것들을 조금씩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서로 이야기하다 여러 사람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연재를 하게 되었다. 우리쌀 100% 담양 막걸리, 비교 불가 대치국수가 생각나시면 대치장으로 놀러 오세요 ~ 편집자주.

익어가는 대추와 냥이들.

 대추 익어가니, 냥이도 크는구나

 40도를 오르내리며 뜨겁던 여름. 파고라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화분의 물주기도 포기했겠지요. 작은 화분들에 있는 꽃들은 지고, 풀들이 쭉~ 쭉~,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있기만 했더랬습니다. 그래도 소나무 화분은 물을 계속해서 주었답니다.

 가을 어느 날 보니 세상에 대추나무에 대추가, 덩~실 덩~실. 큰 놈은 애기 주먹만합니다. 혹시, 이게 사과대추였나, 아니, 왕대추라고 했는데.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대추와 비교해 볼 때, 크기가 결코 더 크면 컸지 뒤지지 않습니다. 그 무더위에도 2, 3일 간격으로 대추나무에 물을 주었는데, 햇볕과 물만으로 이렇게나 탐스럽게 익어가다니.

 마을 산책을 하며 보니, 여느 집 대추나무들도 이번 해에는 대추 크기가 곰돌곰순이네 대추만 합니다. 우리들은 무더위라 했는데, 대추나무에게는 뜨거운 햇볕이 오히려 훌륭한 영양분이 되었을까요.

 가을 볕이 좋은 날 1차로 익은 것들과 익어가는 것들을 땄더니 소쿠리 두 개 가득합니다. 볕이 나올 때마다 종일 볕을 쬘 수 있는 곳에 말리고 있는데, 쭈글쭈글 말라가는 그 모습도 참, 보기 좋습니다. 집사가 마당에 머무는 시간이 좀 걸린다, 싶으면 냥이들이 따라다니곤 하는데, 어느새 냥이들이 파고라 위 대추나무 앞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먹지도 못하는 대추열매를 굴려가며 노는 그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어 봅니다.

현관 앞 피라칸사스.

 가을의 전령사, 피라칸사스

 귀촌 이후 피라칸사스 열매를 처음 보았을 때 많이 놀랐답니다. 포도송이처럼 뭉쳐서 알알이 익어가는 그 모습이 날마다 달라져서. 더 놀라운 건 흰 눈이 내린 겨울을 지나 봄까지 붉은 빛을 뽐내고 있는 겁니다. 먹을 게 없는 한 겨울, 새들이 피라칸사스 열매를 쪼아먹으러 날아오는 그 모습에도 놀랐고.

 날마다 빨갛게 익어가는 농도를 확인할 수 있는데, 시나브로 익어가는 그 속도에 어제도 놀라고, 오늘도 놀라게 됩니다.

 피라칸사스 열매를 본 다음 해 마당 여기저기에 세 그루를 더 심었는데 모두 다 잘 자랐습니다. 그중 유독 현관 앞 피라칸사스 나무에 정이 더 많이 갑니다. 현관 바로 앞에 있어 오며가며 가장 많이 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유독 애착이 더 갑니다. 가지치기를 할 때면 다른 나무들보다 좀 더 오래 머물러 있게 되고. 이럴 때 “첫 정이 그렇다”고 하나 봅니다.

 현관 바로 앞에 있다 보니, 부엌 식탁에 앉아 식사하거나 커피를 한 잔 할 때, 열어 둔 거실 창문으로 시나브로 익어가는 피라칸사스 열매를 관찰하게 됩니다.

 “똑같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걸 날마다 실감하면서 살고 있는데, 가을 들어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 내다보는 마당 풍경을 볼 때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금목서가 필 때면 노란색 달콤한 향기가 흘러가고, 붉은 백일홍과 맨드라미, 노랑코스모스가 하늘거릴 때, 그 왼쪽에서 날마다 붉게 익어가는 피라칸사스 열매가 또 하루가 지났다는 걸 알려줍니다.

 보는 거만으로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피라칸사스. 가끔, 곰돌곰순은 밥 먹다 서로를 향해, 멍, 멍, 하곤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하다가도 밖을 내다보며 어제와 또 다른 피라칸사스 열매를 보고는 멍, 때리곤 하니까요. 멍, 멍, 소리에 가끔은 놀라기도 하고, 가끔은 겸연쩍게 웃기도 합니다. 바로 눈 앞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걸 보게 하니, 피라칸사스는 ‘가을의 전령사’인가 봅니다.

익어가는 가을 들녘.

 잦은 비가 걱정인 황금들녘

 방송에서 해마다 자주 듣는 소리가 “역대급”이라는 말인데, 이번 여름 날씨는 그야말로 ‘역대급’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번 가을에 내리는 비 또한 ‘역대급’인 거 같습니다. 9, 10월 들어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일주일 기준으로 하루 정도이지 않나 싶게 비가 자주 왔으니. 물이 많아 좋을 때는 이미 지났고 수확을 해야 할 시기에 병충해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곰돌이는 장날이 되면, 대치장 국수집에 들러 돼지머리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잔 마신 후, 국수를 먹곤 하는 게 생활의 낙이 되었습니다. 이모님은 쉬시고 이제 며느리가 홀로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곰돌이는 한창 손님이 많은 점심 시간을 피해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곤 합니다.

 손님이 뜸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습니다. 국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먼저 막걸리를 한 잔 합니다. 이모님이 계실 때부터 국수집의 원칙은 손님의 주문을 받은 후 국수를 삼는 거니, 아무래도 주문하고 국수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런데 막걸리는 여느 술과 다르게 “곡주”라,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 마시면 어느새 배가 불러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밥 배 따로, 술 배 따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국수는 또 잘 들어갑니다.

 “장날 국수집에서 보게”하는 약속이 없는 날은 대부분 혼자 가는 것도 익숙한데, 모르는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인데, 혼자 오시거나, 두세 분이 오시기도 합니다. 요즘에 비가 너무 자주 내리지 않나요, 곰돌이 물으면, 그니까요, 더 이상 비가 내리면 안 되는디, 하시곤 합니다. 병충해가 걱정이제~.

 “빛이 강할수록 그늘도 진한 법”이라고 하더니, 가을은 대추도, 피라칸사스도, 벼도 익어가게 하지만,

 걱정거리도 그만큼 던져주는 거 같습니다.

단감나무. 손님이 올 때마다 따 주고 남은 단감들이 보인다.

 가을 들어 냥이들도 커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봄에 태어난 새끼냥이들이 어느덧 중묘가 되었으니.

 곰돌곰순이를 집사로 부리는 냥이들이 점점 많아지니 사료와 간식 주문하는 게 점점 빨라지게 됩니다. 과장을 좀 섞어 보면, 세끼 밥에다, 간식에다, 잔병치레 돌보랴, 적금 들 듯 예산 세우랴, 어디 눈 먼 돈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서랍의 빈 봉투도 다시 뒤져보고, 금전출납부를 이 잡듯 뒤적이다 보니, 냥이들 수발 드느라 등골이 휠 지경입니다(급 정색-진짜? 아니, 농담으로요).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더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만물이 익어가는 가을에, 아니 가을이 만물을 익어가게 하는데, 곰돌곰순이는 대추처럼, 피라칸사스 열매처럼, 벼 이삭처럼, 그리고 냥이들처럼 익어가고 성장하고 있는 걸까요.

 가을이 되니, 감상에 빠지는 날도 많아지게 되고, 그래서인지 눈물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절로 돌아보는 지난 봄, 여름 그리고 지금 가을, 사랑하는 어머니, 가족, 가르치는 학생들, 만나는 사람들,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 그리고 선율 회원들.

 자연의 시간에 제대로 녹아드는지 모르겠지만, 이 가을이, 곰돌곰순이를 조금은 더, 익어가게 하나 봅니다.

 곰돌 백청일(논술학원장), 곰순 오숙희(전북과학대학교 간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