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지고 비어지는 계절 속에서
[곰돌곰순의 귀촌일기] (120) 황금들판 비어갈 때 국화는 만개하니
곰돌곰순은 한재골로 바람을 쐬러 가다 대치 마을에 매료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실 성당이랑 농협, 우체국, 파출소, 마트 등을 발견하고는 2018년 여름 이사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당에 작물도 키우고 동네 5일장(3, 8일)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에 국수 한 그릇으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고 있다. 지나 보내기 아까운 것들을 조금씩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서로 이야기하다 여러 사람과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 연재를 하게 되었다. 우리쌀 100% 담양 막걸리, 비교 불가 대치국수가 생각나시면 대치장으로 놀러 오세요 ~ 편집자주.
시간을 수확하니 가을 들녘은 비어 가고
이른 아침부터 트랙터 소리가 들립니다. 집 옆 논에서 어제 다 마무리하지 못한 벼 수확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멀리 돌아오는 트랙터를 가만히 보노라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동네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시기만 되면 편의점 아들이 트랙터 운전대를 잡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드론으로 농약을 살포하더니, 재주가 많은 청년입니다.
남아 있던 논의 벼들이 과일 껍질 벗겨지듯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모습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또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비어 있던 겨울 들판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논갈이를 두 번이나 했고, 돌아서니 모내기를 끝냈고, 자고 일어나 보니 어린 모들이 무릎까지 자라 온 들판이 푸르렀는데, 차 한 잔 마셨더니 황금들판이 이렇게 다시 비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작아지는 타원 모양의 벼들이 잠시 후 모두 사라지고 이곳 들판엔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는’ 들판이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시간을 거둔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식사 때 모이던 냥이들도 흩어지고
하나둘 독립하던 냥이들이 작년, 올해 사이좋게 지낸 덕분(?!)인지 어미 냥이들이 새끼를 이곳에서 낳아서 기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낳고 키우다 이곳으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미 세 마리가 낳고 데려온 새끼들 숫자도 상당해서 이제 냥이네는 ‘대가족’이라 부르기도 좀 거시기했답니다. 곰돌곰순은 농담으로 “자기야, 이제 ‘냥이네 부족’이라 해야 하지 않아요?” 하며 웃기도 했지요.
좋은 일도 오래 가지 않고, 좋지 않은 일도 참고 견디다 보면 서서히 잊히기도 하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에 오래 취해 있지 말고, 괴롭고 슬픈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시련은 지나가니 인내하라고 하지요.
냥이들을 바라볼 때도 그렇습니다. 점점 늘어가는 냥이네 식구를 보면서 곰돌곰순은 우스갯소리를 자주 했답니다. “자기야, 얘들한테 가족계획을 좀 하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요, 어미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새끼들을 툭 내려놓고 가 버리지 말라고, 저기 밖의 길냥이들에게도 좀 방송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에휴, 그렇다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하며 웃었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참치와 닭가슴살을 뺄 수도 없고, 간식도 안 줄 수도 없으니 곰돌곰순이 서로에게 귀여운 하소연(!)을 했던 거지요. 서로에게 “자기야, 그래도 이것도 한때겠지요”라고 말하면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냥이들이 주는 예측 불가능성을, 무료하고 식상한 일상이지만 적당한 긴장을 하면서 살라는 가르침으로 삼다 보니 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꽃들과 열매와 채소와 공기와 햇빛과 만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식까지,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게 없긴 하지만요.
그렇게 함께 지내던 냥이네 가족이었는데…. 여러 이유로 냥이들이 한 마리, 한 마리 그렇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도, 밥을 가지러 걸어갈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따라다니는 모습을 볼 때도, 서로 모여서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가슴 한편이 아릿하기도 하고 심장이 아래로 푹 꺼지는 듯도 했습니다.
“이것도 한때이니 있을 때 잘해 주자”라고 한 생각 자체만으로 냥이들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좀 더 잘해 줄 걸 하는 생각이 샘물처럼 끊이지 않고 흐를 때 곰순이에게 말하기도 했지요. 그때마다 곰순이 왈, “아니에요. 우리랑 만나서 함께 지낸 시간에 서로 행복했으니까요. 우리도 최선을 다했으니 좋은 기억으로 간직해요.”라고 말합니다. 본인도 힘들 텐데, 참 회복력이 뛰어나고 현명한 것 같습니다.
향기 가득한 국화 옆 냥이들도 거닐고
해마다 봄이 되면 국화가 올라옵니다. 그런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올라옵니다. 작년까지 텃밭이든 나무 옆이든 산책로든 아주 불편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뽑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봄부터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올라오는 걸 지켜보다 산책하거나 정자나 의자에 앉아 지켜보기 좋은 곳을 중심으로 관리하고, 길가에 핀 국화들을 정리했습니다. 텃밭도 벌써 몇 해째 군락지를 형성한 곳은 그대로 유지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자라는 국화들은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봄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초가을에 한 번 잘라 주기를 했습니다. 국화는 성장이 빠른 편이라 1년에 몇 번 잘라 주어야 가을에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해는 그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바쁜 일로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느새 허리춤까지 올라와 있거나 옆으로 눕기도 하고, 바닥으로 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가을에 꽃 구경 대신 사람 어깨까지 올라온 국화 줄기 구경하겠다고 손을 썼겠지요.
무릎 정도만 올라와도 옆으로 퍼져 버리고, 시기를 놓치면 줄기가 굵어져 일으켜 세우려고 하면 줄기가 부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올라오는 속도를 지켜보다 군락지 양쪽에 말뚝을 박아 마끈으로 아래쪽부터 울타리를 만들어 두는데, 성장하면 또 한 줄 더 만들어서 줄기들이 위로 힘차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대게 도와주었습니다.
11월 들어 마당 여기저기서 조금씩 꽃망울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중순이 되자 풍성하게 꽃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절정인가, 아직도 터지지 않은 꽃망울이 많은 걸 보니 앞으로도 한창이겠지요. 달콤한 금목서 향이 마당을 진동하고 나면 은목서가 그 뒤를 따르는데, 이번에는 은목서가 좀 늦어서 이제야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습니다.
정자 앞에 있는 은목서 향을 맡으며 국화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산책길을 빙 돌아 다시 정자로 돌아옵니다. 정자 옆 산책길에는 어느 해 산에서 꺾어 온 몇 개의 가지가 뿌리를 튼튼하게 내려 한두 해 전부터 군락지가 된 산국이 노란빛을 띠며 풍성하면서도 은은한 향기를 뽐내고 있습니다. 가끔은 냥이들이 산책길을 걷는 곰돌곰순을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황금빛 들녘이 비어 가고, 대가족 냥이네의 식사 풍경이 마지막 풍경이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허전하기도 한데, 국화는 또 이렇게 풍성하게 피어나고, 냥이들도 곰돌곰순을 따라다니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지요. 그래서 자신은 인생을 늘 멀리서 보려 한다고. 인생사 새옹지마이듯, 크게 보면 사계절의 순환처럼 늘 채워지고 비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겠지요. 인간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근원적인 비극 앞에서, 그럼에도 거장은 인생을 멀리서 보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저런 개인사에도, 세상이 어찌 돌아갈지 암담한 현실 앞에서도 거장이 던진 말의 울림이 가슴 가득 회오리가 되어 이정표가 되었다고 느껴지는 건, 이 가을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곰돌 백청일(논술학원장), 곰순 오숙희(전북과학대학교 간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