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방문자들과 가을 단풍 찾기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짧은 가을을 건너는 길
종잡을 수 없는 날씨는 가을을 생략하고 만다. 황금으로 물든 영암뜨락을 809미터의 월출산 천황봉에서 내려보고 싶었지만 잦은 비로 볏잎이 아직 푸르딩딩하고 산행길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며칠 바짝 볕이 이는가 싶더니 들판이 휑하니 되어 버렸다. 국화축제, 한옥비엔날레, 마한역사문화제, 베트남 다낭시청 문화체육관광국과 공연단의 방문 등으로 10월말에서 11월이 삽시간에 지나간다. 황금 들녘의 곡식들은 벌써 어딘가의 곳간으로 가 버리고, 비워진 논에는 한가한 곤포사일리지만 뒹굴고 있다.
서른 초입 장흥 천관산문학관에 올랐을 때 돌 위에 새겨진 글귀가 떠오른다. 박범신작가의 ‘봄’, “내가 빈 논의 저 쓸쓸한 벼 그루터기가 되고 싶은 건 다른 것이 아니야. 암것도 아니야 봄날 경운기 삽날에 아낌없이 뿌리째 뒤집혀 지고 싶기 때문이야. 그뿐이야”라는 내용. 뿌리째 뒤집혀야 다시 봄이 오고 새 생명이 온다는 말이 벌써 을씨년스런 가을날씨가 호명하게 한다. 기후위기시대를 맞이한 현 상황은 참 답답하다.
기후위기의 현장감
이상기후로 금년의 쌀 수확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고, 과일들은 꽃피는 무렵부터 냉해를 입고, 여름에는 집중호우에 낙과가 발생하고, 가을에는 일조량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완제품을 얻기 어렵다는 현실이 실감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럼에도 쥐꼬리만한 가을을 찾아가 보고자 하는데 일정들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던 주말 베트남에서 오신 방문객들을 직접 안내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먼저 일정표를 보니 16일 오전 강진차밭, 다산초당, 백련사를 탐방하고, 점심은 영암의 왕인박사유적지에 있는 천상이라는 중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도갑사와 하정웅미술관을 거쳐 한국의 카페를 체험하고, 저녁식사는 치맥을 경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침 일정이 빠듯하니 양해를 구하고 코스 조정에 들어갔다. 월출산의 다원을 들른 후 인접한 백운동원림을 방문한 후 점심을 드시는 것으로 한 것이다.
외국인 여행자들과는 참 오랜만에 함께 여행을 떠나는 자리라서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물론 이분들은 며칠전에 오셔서 군수님과 함께 면담하는 자리도 가졌고, 재단과 다낭시 관광국과 MOU를 비롯해 마한역사문화제와 해마루라는 영암군 가족센터 준공식에서 공연도 해 주셨는지라 친근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마침 날씨도 여느 가을처럼 맑고 청명하며 구름 몇 점이 흐르고 있었다. 10만여 평의 차밭에 도착하자 모두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차밭의 신선함에 감탄사를 쏟아 냈다. 베트남에도 있는 차밭이지만 다낭시의 관계자들은 가보지 못했는 듯 했다. 일찌감치 차나무를 인도로부터 가져와 지리산 인근에서 재배하며 다선일체의 선사상을 확립했던 불교에 관한 이야기나 이로부터 대흥사, 백련사, 도갑사 등을 다니며 차에 대한 조선의 세계관을 확립했던 동다송을 지은 초의선사 등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해서 그냥 차꽃이 핀 지금과 단풍이 어우러진 월출산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로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자유시간을 주었다. 모두 차밭과 붉게 물든 단풍나무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릴스를 촬영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SNS 시대의 여행객들
지금 베트남에는 숏츠와 같은 SNS 열풍이라고 통역사가 귀뜸해 준다. 그렇다면 나도 전략이 좀 바뀔 필요가 있겠다 싶어진다. 영화 ‘가을로’처럼 오로지 초록 세상만 경험하는 이분들에게 우리나라의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게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백운동원림 전시관에 들어선다. 이담로가 조성한 호남의 3대 정원인 이곳은 느지막하게 세상에 알려져 비교적 원형질이 잘 담겨 있는 곳이고, 그 후손들이 선조의 유지를 잘 이어받아 진귀한 유적들도 공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외국 손님들에게 이것을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으니 특징이 있는 유물만 설명하고 스쳐가듯이 유물관을 나왔다. 원림 초입의 징을 두드려 보았다. 모두들 놀란다. 이것을 때리면 출타했던 주인장이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차임벨이라고 하니 공연단 단원이 징을 쳐 본다. 그 소리의 울림이 커서 모두들 호기심을 가진다. 어둑시근한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의 숲을 지나 들어선 원림은 가을로 가득하다.
여기에는 12가지의 경관을 예부터 칭송해왔는데 이것을 만든 사람은 이담로라는 선비이지만 이 공간에 흠뻑 빠진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유배 온 선비였음을 알려 드렸다. 그는 초의선사와 함께 12가지의 뷰 포인트를 하나씩 찾아가며 음미하도록 했다. 삶의 방식이나 사고의 형태가 다름에도 동양사람인데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니 이해할 듯 해서 최대한 설명은 절제하며 보여드린 것이다. 듣고, 보고, 만지면서 마침내 정선대에 이르니 단풍잎 사이로 기암괴석이 들어찬 월출산 옥판봉과 절묘하게 만들어낸 경치에 모두 환호를 한다.
정선대에서 만난 단풍의 절정
정말 이분들은 단풍에 진심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신하며 대나무숲으로 나온다. 사실 대밭에는 큰 관심이 없을 듯 했는데 또 멈춰선다. 어떻게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숲이 정리되어 있느냐는 질문과 더불어 사진을 찍는다고 시간을 달라한다. 기실 대밭은 동남아가 더 웅장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활용의 방식이 다르겠구나 싶어졌다. 우리는 풍경의 일부로서, 그들은 생필품의 하나로서 였 던 것이다.
대밭을 나오니 이전과는 다른 다원이 펼쳐진다. 또 한번의 환호성이 울리고, 나는 사진을 찍을 넉넉한 시간을 주다 이제 영암으로 가자구 했다. 오전 11시40분경, 우리를 태운 대형버스는 도갑사쪽 삼거리에 멈췄다. 죽정리 국장생이 있고 그 옆으로 정조의 릉인 건릉에 향탄을 올리는 숲이 있다는 표지석이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단풍 맛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그분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낙엽이 지는 것을 붙들고 있었던 나만의 단풍명소인데 여러분께 15분만 공개하겠노라고 말이다. 모두들 또 단풍에 젖어든다.
다시 차에 오르시게 하고 약속시간인 12시에 청와대에서 중식당의 세프를 맡아 23년을 일하다 지난 10월 20일오픈한 ‘천상’에 도착했다. 메뉴는 한국인들의 대표음식인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셋팅되었다. 이것을 우리 국민들이 최애하는 음식이라고 소개 드리니 모두들 맛있게 드신다. 그릇이 모두 비워지고, 식당을 나온 우리는 왕인박사유적지를 산책한다. 마침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이 맞이하여 소상하게 왕인박사를 설명해 주신다. 그 덕분에 나는 널찍한 왕인박사 유적지의 한 귀퉁이를 거닐었다.
30여 분의 시간이 지나 바로 인접한 목재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11월 1일부터 16일까지 대한민국 한옥비엔날레가 열리는 현장이다. 마침 한복입기 체험행사를 하는 관광두레 주민사업체 고영한복의 코너가 있어 다낭시청 관계자 4분이서 환복을 했다. 화사한 분위기의 날개를 단 이분들은 마치 종묘의 회랑과 같은 건물구조에 어리둥절하며 저마다의 포즈를 취하며 영상의 세계에 접어든다. 서울에 가지 않아도 영암안에서도 충분히 한국적 미학에 젖어들 수 있다는 사실에 서로 안도했다. 전시된 실내로 들어가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작가의 작품도 보고, 억새를 이용한 새털같은 집도 보고, 한국의 온돌이 어떤 구조인지, 백자를 바라보는 미적 체험이 얼마나 안온한지 경험하고 하정웅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하정웅미술관에서의 예술 교류
남도를 대표하는 6인의 작가전을 보며 다낭시의 전시 담당자와 작가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레지던스 공간에 초대해서 교류를 시작해보자고 운을 뗐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온다. 도갑사, 오전에 주지스님께 차 공양을 부탁하고자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그냥 중요 문화재와 단풍만 보려 마음 먹었다. 인연이었는지 절집으로 들어가는 일주문 앞에서 우리 일행과 수관 주지스님이 마주쳤다. 합장으로 인사를 드리고 이곳에서 두시간 정도 있을 예정이라 하니 한시간 후에 차를 대접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한국사찰의 색다른 묘미를 이분들게 선물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광제루의 갤러리를 둘러보고 대웅보전의 삼불과 후면의 탱화그림을 설명드리면서 마침내 미륵전 앞 용수폭포쪽 단풍까지 보여드렸다. 이렇게 기승전 단풍으로 이어지는 풍경의 선물은 다낭시 분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계절을 잊은 내 자신에게도 선물이 되었다. 스님과 차담을 하니 다낭시의 국장께서 재단과 교류도 하고, 다낭시와 영암군도 교류를 하게 되었으니, 다낭시의 가장 큰 사찰과 도갑사도 교류를 하면 어떻겠냐고 스님께 정중하게 여쭈신다. 진심이 통하는 마당이었다. 서로 그러하시자구 하면서 경내를 빠져나왔다.
바로 차에 오르지 않고 삼백여 미터를 걷자고 했다. 터널처럼 단풍이 이어진 구간이었다. 다시 이분들은 저물어오는 하루를 저물어 가는 단풍을 탐닉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많이 걸었던 하루, 영암읍내의 BHC에서 각종의 치킨을 드시고, 마지막으로 오거리 GS25편의점에서 아이스컵과 바나나 우유와 헤이즐럿을 쇼핑하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붉어진 마음으로 보내시도록 했다. 하루가 온통 붉은 일요일이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