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고개로 접어든다.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 가장 높고 험한, 그래서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이름난 곳이다. 문경새재. 호남에선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다.

 ‘문~경 새재는 몇구비인가. 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로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진도아리랑’에 이 고개가 등장할까?

 칼바람 앙칼졌던 겨울 초입, 그 고갯길을 걸었다. 새재(조령)는 ‘새들도 날아서 넘기 어려워 쉬어간’대서 붙여졌다는 이름이라고 한다.

 경상도와 기호지방을 잇는 최단거리, 그 중간에 우뚝 선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사회·문화·경제의 유통로, 그리고 국방의 요충지였다. 수많은 ‘장삼이사’들이 이 길을 통행했다.

 봇짐 멘 보부상들은 이문을 쫓아 넘나들었다. 산 넘고 물 넘어 팔도강산 떠돌던 이들에게 문경새재는 험준하다고해서 피할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과거시험 보러 한양길 나선 유생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왔다. 들을 ‘문(聞)’, 경사 ‘경(慶)’자가 박힌 동네. ‘기쁜 소식을 들을 것’이라는 지명은 ‘합격’ 주술과도 같았으리라.

  “호남지역에서 과거 시험 보러 한양가는 이들도 일부러 이 길로 돌아서 가기도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 초입에 들어선 ‘옛길박물관’에서 만난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혹시 진도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등장하는 게 이런 연유 때문일까?
 
문경새재는 몇구비인가?
 
 1592년 임진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도 이 고개를 넘었다. 부산진·동래부 등 남해 최일선이 초토화된 가운데, 조선은 왜군의 한양 입성을 저지할 교두보로 문경새재 방어에 주력했다.

막중한 소임을 부여받은 장수가 신립이었으나, 그의 전술은 달랐다. “조선은 기병이고, 일본군은 보병이 중심이니 넓은 벌판에서 기동력을 이용해 싸워야 한다.”

  신립은 문경새재를 비워뒀고 왜군은 저항없이 천혜의 요충지를 넘었다. 대신 신립은 충주 탄금대 평야에 진 쳤다. 남한강을 배수진 삼은 결사전이었다.

   결과는 대패. 조총이라는 개인화기 앞에 조선군의 말과 병사는 너무 큰 표적이었다. 이 싸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혹독하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용은 ‘징비록’에 ‘신립은 전투의 계책에 부족한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도 “천혜의 요새지 조령을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라고 가세했다.

   훗날 다산 정약용도 거든다.

   ‘欲起申砬與論事(욕기신립여논사) 啓門納寇奚爲哉(계문납구해위재)/ 신립을 일으켜 관방 일을 논하고 싶어라/문 열어 적을 받아들인 건 어째서였나.’ 

   1801년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 유배길 떠난 다산이 충주에 이르러 지었다는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도 이같은 비판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신립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다.

 문경새재에 오르니, 신립의 항변이 들리는 듯 하다.

 ‘그 난리에 임금(선조)은, 영상(류성용)은 무얼 하셨소? 한양을 버리고 야반도주해 개성으로, 평양으로, 끝내 의주까지 몽진하지 않았소. 오죽 분노했으면 백성들이 임금이 버리고 간 경복궁을 불태웠겠소. 여차하면 명으로 망명하겠다고 국경까지 도망간 그대들이 임금이고 조정이오? 요행이 이순신이 있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보급로가 끊긴 일본 육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으니 망정이지. 조정은 없었으나, 강토를 지키려 의병들이 나섰고. 관민은 함께 진주성에서, 행주산성에서 싸워 이겼소. 전장에서 장수가 이기고 지는 건 상시 있는 일이나, 조정이 도망친 건 명분도 의리도 팽개친 패륜이니, 내 비록 패장일지라도 그 ‘몰염치’앞엔 차마 잠잠할 수 없어 한마디 안할 수 없소.’
 
험산준령 겁내지 않고 들어서야…
 
 임진난 이후 광해군 재위 5년(1613년), 문경새재를 넘던 보부상이 살해당하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일곱 서자들이 일으킨 강도 사건이었다.

  조선시대 서자들은 재주가 있어도 그 뜻을 펼칠 수 없었으니, 명문가의 자제들이지만 신분상 한계가 분명했던 이들은 세상을 원망하며 거사(?)를 꿈꿨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인의 은을 빼앗았다고 기록된 사건이다. 

   이는 ‘계축옥사’로 확산해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역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사사되기에 이른다.

 허균이 썼다고 알려진 ‘홍길동전’의 모티프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알려진대로 홍길동은 호부호형마저 허락되지 않은 세상과 갈등하다 새롭게 이상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현실 속 서자들의 실패를 소설로나마 보상했다고 할까.

 살다보면 수많은 고갯길을 만난다. 고개는 과정이지 종착지는 아니어서 넘어서지 않으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호구지책으로, 이문으로, 욕망으로 넘었던 이들에게도 문경새재는 그런 의미였으리라. 그들이 모두 새 세상을 만났을까마는, 험산준령 겁내지 않고 들어섰기에 꿈이라도 꿀 수 있었으리라.

 한해를 마무리하자니 문경새재에서의 한 날이 또렷하다.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고갯길서 허우적 거렸던 2019년이었다.

  언제쯤 고개를 넘을 수 있을까? 정상에 이르러야만 가늠할 수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올라야할 운명이라니. 2020년, 다시 고갯길 오를 채비를 할 수밖에….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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