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이상주의’ 토대 혹독한 진중권
“자신에 대한 도덕적 점검 수반돼야”

▲ JTBC ‘전용우의 뉴스ON’ 화면 캡쳐.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진중권과 유시민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두 지식인이 만들어낸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한국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비교하는 것은 단지 어떤 누군가를 우위에 두어 찬양하거나, 어떤 누군가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떤 인물에 대한 판단과 비난은 정서적 카타르시스와 자기주장의 확실성을 느끼게는 해주지만, 이해를 통한 자기성장을 이끌지는 못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옹호하게 될 수도 있고, 그 지점을 기반으로 우리가 더 성장할지도 모른다.

다수의 사람들은 최근 ‘JTBC 신년 토론회’ 이후 진중권의 행적을 ‘자기 파멸’로 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다수의 사람에게 받는 비난은 외부의 정치세력, 누구로부터가 아니라 그 자신의 말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평가에 상당히 공감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일회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성격이 만들어낸 과정, 조금 더 과장하자면 운명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관점은 과거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들의 몰락이 그들이 지닌 성격에 기반 하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처럼. 또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등장하는 인물들-햄릿이나 오셀로처럼-의 비극도 일회적 사건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그들의 성격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환경 때문 아닌 그들의 성격 때문”
 
많은 전문가를 비롯한 일반인이 진중권의 모든 말과 저작 자체를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대표적 저서 ‘미학 오디세이’ 이외에 다수의 저술, 번역서, 칼럼 등을 써왔다.

그가 논문의 형태는 아니지만 꾸준한 사색과 연구를 해왔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청년세대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그의 강의를 높게 평가해 왔다. 모 작가처럼 한 지식인의 학문적 세계를 일회적 사건으로 인해 ‘머리가 나빠서 박사학위를 못 땄나?’라고 모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는 또한 정치적 변화에 참여한 지식인이다. 그가 정치참여를 의도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1997년 귀국 전 이인화의 문예지와 관련해서 휘말려 들어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소 소설적 상상력일 수 있겠는데 그의 성향이 만들어낸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으로 진보논객으로 평가받게 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에 당적을 두며 부지런히 정치관련 활동을 했다.

그의 전성기는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혁명 기간 동안 진행했던 ‘노유진의 정치카페’ 활동 시기이다. 그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비판하고, 비논리적이며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했지만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 사회변화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를 처음부터 그랬다거나(보수적), 변절자라는 식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를 김문수, 이언주와 같은 범주로 보는 것은 결례이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것은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지식인이 왜 정치지형에서 진보적 영역을 보수 이상으로 비판하게 되었는가?’이다.

다수의 시민은-특히 일명 중도라고 부르는- 어떤 정치인이나 정권, 정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어떤 정책은 좋게 평가하지만 다른 정책은 거부한다. 문재인 정권이나 민주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정권의 다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시민일지라도 과거 검찰의 과도한 정치적 개입(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 등), 권력의 남용과 부정부패(우병우 민정수석, 김기춘 실장, 진경준 검사장 등) 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시민이라면 현 정권이 정책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설치에 대해서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명된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것은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면 당연한 일이다. 과거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 국회의원 등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을 검증할 때 성인처럼 도덕적 완벽함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지는 못했지 않은가?

그런 기대를 가질 영역도 아니고, 그런 기대를 가져서도 안 되는 영역이지만. 검찰이 일명 범죄라고 지칭하며 수사하고 있는 조국 교수와 그의 아내의 범죄가 사실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어찌 보면 검찰이 확신하듯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죄의 경중과 수사기간과 범위를 보았을 때 무척 이례적이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 2010‘곽노현 지키기’ 비판과 유사
 
진중권이 동양대에 교적을 두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처신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직간접적으로 조국 법무부장관과 그의 아내 정경심 교수에 대해 무언가 발언을 해야 되는 불가피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니까! 그의 조국 교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조국 교수에 대해 옹호하는 집단과 사람에 대한 경멸은 2020년 ‘JTBC 신년 토론회’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그는 조국 전 장관과 정경심 교수의 검찰수사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이를 옹호하는 시민들의 맹목성을 비판하였고, 시민들의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 지지에 유시민의 ‘알릴레오’라는 미디어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의 주장이 완벽하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아주 일정 부분은 그의 주장이 타당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찰이 범죄라고 보는 부분이 일부 사실로 드러날 수도 있다.(그것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어도) 조국 전 장관을 지지하는 시민 중 일부는 맹목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민 중 일부는 유시민 작가의 ‘알릴레오’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분명 과도한 것이며, 현실감을 잃은 것이다.

검찰의 수사는 완벽하게 정당하지도 않고, 시민들은 맹목적이지도 않고, 유시민 작가의 방송에 일방적으로 최면에 걸린 것도 아니다.

진중권의 과도한 비난은 무엇 때문일까?

일종의 그의 성품 때문이 아닐까? 그가 과거에 2010~2013년 사이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교육감과 관련된 비판을 했을 때도 지금과 유사했다.

진보영역에서 ‘곽노현 지키기’의 흐름이 있었고, 이에 대해 진중권은 “법원의 판결과 상관없이 이미 커다란 ‘도덕적 추문‘”이라고 비판하면서 곽노현 사퇴와 처벌을 주장했고, 동시에 곽노현 지지에 대한 여론 변화를 “선동 한방에 대중의 분위기가 바뀌어“라며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곽노현 전 교육감에 대한 진중권의 반응이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상황에 대한 반응과 너무나 유사하여 데자뷰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의 반복적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썩 괜찮은 설명은 그가 매우 정의감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관점이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잘못을 따지고 있지 않은가?

특히 그의 비판은 일명 진보라고 하는 영역, 사람에게 더욱 매섭지 않은가? 그에게는 과거 인맥이나, 동료 등과 같은 인정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정의라는 이성에만 의지하여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은가?

이러한 특징은 반드시 비난받을만한 것은 아니지만, 왜 다수의 사람들에게 과도하고, 비인간적이며, 더 나아가서 비도덕적이라고 느끼게 할까?
 
▲죄와 벌, 그 상응성에 대한 평가
 
사람들에게는 죄와 벌의 상응성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존재한다. 비록 어떤 사람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의 죄를 넘어선 벌은 싫어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만일 그러한 행동을 관망하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중권의 조국 비판, 유시민 비판은 그들의 잘못에 비해 혹독하다고 느낄 만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도덕적 발달단계에서 도덕의 이상성, 절대성을 믿고,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아동과 같다. 그 시기에 아동들은 부모, 선생님, 친구 등 모든 사람들의 크고 작은 잘못을 모두 죄라 보며, 반드시 교정되거나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도덕적 이상주의에 빠져있다면 그의 폭발할 듯 한 분노도 이해할만하다.

이러한 도덕적 이상주의에 빠진 자의 가장 큰 오류는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도덕적 점검을 하지 않는 자의 오만한 비판을 우리는 수용해야할까?

진중권 자신이 쏟아낸 수많은 도덕적 평가를 자신에게 돌렸을 때 그는 그러한 도덕적 평가를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나라의 변고가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죄 지은 자를 찾고자 하였다. 관객이 이 장면을 비극으로 느끼는 것은 왕이 그 자신의 잘못을 자신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완벽한 도덕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정의석<지역사회심리건강지원그룹 모두(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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