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총궐기, 그 강렬했던 민심 태풍이 지나간 뒤, 시민들에게 ‘순실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지난 주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파헤쳐지며 고구마 줄기 캐듯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가 터져나오자, 광주전남에도 규탄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과 집회가 이어졌다.

 성난 민심은 12일, 광화문에서, 서울시청에서, 5·18민주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평화시위 물결로 터져나왔다.

 어느 하나 속시원하게 공개되는 것 없는 국정에 참다 못한 시민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내자며, 국민의 힘을 보여주자며 나온 것이다.

 그날 대한민국 사람들 참 대단했다.

 자녀와 함께 나온 가족들, 교복 입고 나온 학생들, 교사들, 노동자들…100만 명의 ‘시위대’는 대통령이 먹칠해버린 대한민국의 위상을 외신들을 통해 다시 세우는 결과도 이끌어냈다.

 그런데 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뒤,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없는 현실에 시민들은 이젠 ‘허탈감’을 토로하고 있다.

 급기야 ‘불공평한 세상’, ‘사회적 박탈감’ 때문에 생겨난 우울감·무기력감을 말하는 ‘순실증’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불공평· 박탈감이 불러온 집단 우울

 거리에서, 촛불집회장에서, SNS에서 들은 광주시민의 목소리는 이렇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데 이 정권에서 임명장을 받으면 수치스러울 것 같아…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돼요”, “슈퍼문, 보름달은 저렇게 밝은데…어휴, 최순실, 박근혜 국정농단 때문에 우리네 마음은 어둡고 열불이 나네요”, “모든 국민이 최순실과 박근혜에게 집단으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판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허탈감을 느끼는 건 꿈을 키워가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말을 남긴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의 대학 입학부정 의혹 때문이다.

 입시 제도에 대한 신뢰 훼손과 더불어 ‘현재 하고 있는 공부를 계속 해야 하나’라는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

 수피아여고에 다니는 한 학생은 “돈만 있으면 좋은 대학에 가는데…”라며 “입시지옥을 지나 대학에 가도 취업지옥이 또 다가온다는 걸 알면서도 해야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생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드디어 실감이 난다”면서 “수능을 마치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것”이라며 집회 참가 의지도 드러냈다.

 기성 세대 선배로서, 오빠·형으로서, 기자로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때 나타났던 ‘국민의 집단 우울증’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깊은 허무주의에 빠뜨리고 있다.

 대통령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자괴감 들어”라는 대국민담화 발언과, 진료기록을 놓고 벌어지는 이른바 ‘길라임’ 사건의 의혹들은 갖가지 풍자와 조롱을 낳으며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시위 현장, 거리 현수막, 광고 등을 온통 뒤덮고 있다.



“뭐라도 해야 이겨낸다”…19일 10만 집회

 상황이 이렇자 일부에선 “순실의 시대가 허무주의의 ‘상실의 시대’로 심화되고 있다”는 푸념도 나온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우상 씨는 순실증 앓이에 대해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우울감과는 달리 순실증은 나를 지탱하던 콘트롤타워가 통째로 무너지는 무기력감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진단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집회에 나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뭔가’라도 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순실증의 진단은 분노보다는 무기력감에 가깝다.

 그리고 무기력감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은 ‘뭐라도 하는 것’이다.

 19일 토요일, 광주 5·18민주광장에는 10만 명의 광주시민들이 ‘순실증 이겨내기’를 위해 모일 예정이다.

김현 기자 hyu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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