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중항쟁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광주 5·18민중항쟁은 올해로 37주년을 맞이했고, 광주는 37년째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5·18민중항쟁으로 죽었던 이들보다 끝까지 살아남아 5·18의 잔상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에 무게를 둔다. 소설에 나오듯, 광주는 피폭을 당한 지역처럼 5·18민중항쟁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5·18민중항쟁을 직접 겪었거나, 광주와 연고가 있거나, 이후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크고 작음의 편차만 있을 뿐 모두 같은 병증을 지닌다.



국가 폭력과 살육, 진상 규명부터

 20년은 넘고 30년은 못되게 살아온 기자는 광주와 전남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지금껏 다녔던 학교에서는 교과과정을 미루면서까지 5·18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소풍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갔다. 현재 ‘어린이체험학습관’이 된 전시관은 당시에도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것처럼 지하에 있었다. 한 플라스틱 가벽 위에는 ‘노약자 관람 금지’라는 경고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금지’의 유혹을 지나칠 리 없었다. 설익은 눈 여러 개가 모여 들어간 가벽 뒤편에는, 사람의 형상이 지워져 핏덩이에 가까운 5·18 희생자들의 사진 기록물이 있었다.

 5·18민중항쟁에서 발생했던 살육과 폭력은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자를 따라다니는 태생적인 슬픔이다. 머리가 굵은 이후부터 종종 5·18로부터 이만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때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장례식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비장함과 엄숙함은 광주 전체를 짓누른다. 누구도, 그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기에, 고요한 도시는 4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상을 치르고 있다.

 광주는 하나의 섬이었다. 80년 5월, 통신과 출입이 불가능했던 지리적 고립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정치적·역사적·정신적으로 육지 안의 바위섬이다. 광주 권역 내에서는 발 딛는 곳마다 5·18의 잔상이 남아 있고, 지나가는 시민을 붙들어 5·18에 대한 연고를 물으면 가족·이웃·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필자는 광주를 벗어나 보기 전까지, 모든 지역의 공기에서 한이 녹아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 바깥에선 누구도 5·18을 알지 못한다.



새 정부에선 광주 회복 가능할까

 지난 18일 제37주년 5·18민중항쟁 기념식에서는 80년 당시 가족을 잃었던 오월어머니들과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80년 당시 시민군으로 고문을 당했던 유공자는 당일 기념식 직후 갑작스레 쓰러져 급히 이송됐다. 항쟁 이후 세대는 그들의 막연한 슬픔을 가늠할 뿐이다. 광주라는 섬에 오래도록 고립됐던 피해자들의 한은 어느 정도일까.

 소설 ‘소년이 온다’엔 그해 5월 27일 전남도청의 마지막 격전지에서 아들을 잃고 유족이 된 어머니의 ‘그 날 네 손을 잡고 도청을 나왔어야 했다’는 독백이 흐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하는 날, 가족들의 죽음을 호소하려 피켓을 들었던 오월 어머니들이 무엇 하나도 하지 못하고 경찰서로 끌려간다.

 지난 18일 5·18민중항쟁 기념식 직후 만났던 오월 어머니들은 하얀 상복을 입은 채였다. 진상 규명을 약속한 대통령 기념사에 눈물을 보인 이들은 “가족이 5·18 희생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쫓기고, 구 묘지까지 숨죽여 찾아가던 시절이 생각났다”며 “이제야 희생당했던 가족이 하늘에서 웃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광주는 37년째 5·18 속에서 살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의 한이 풀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장례식을 끝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피해자인 광주는 이제 탈상하고 상갓집에서 벗어나고 싶다. 트라우마도 치유받고 싶다. 이를 위해선 가해자에 대한 단죄와 진상 규명이 선행돼야 한다. 광주가 기대 걸고 있는 새 정부가 반드시 해줘야 할 일이다.

양유진 기자 seoyj@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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