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가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교육정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단순히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는 문제가 아니라 고교교육과정과 학교운영 방식 전반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제시하는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선택권을 제한적으로 보장한 것이라면,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에 의해 교육과정을 구성해가는 것이다.

 특히 고교 학점제 도입의 가장 큰 근거는 후기중등교육(고등학교 교육)이 진로 탐색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도 ‘고교학점제 운영을 통한 진로 맞춤형 교육’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서울시 교육청의 보고서(일반고 중심의 평등한 교육체제를 위한 교육과정 운영 재구조화 방안, 2016)도 진로탐색형 교육과정 즉 과목선택권의 보장을 통해 학생들 개개인이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기 위한 개별적인 교육과정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리토크라시’ 강화, 과목 선택 우려

 7차 교육과정 이후(특히 2009 교육과정은) 형식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완전한 선택권을 부여하였지만 실제로는 학교교육의 여건으로 인해 몇 가지의 교육과정(주로 문·이과 과정이다.)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그 내에서 다시 제한된 과목선택권만 부여하였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목선택권의 완전한 부여를 위해 고교 학점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여 결정하고 그에 맞는 교과목들을 선택하여 구성하는 ‘교육과정 선택권 보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진행해나감에 있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교육과정을 밟게 될 학생들을 홉스식의 고립된 원자론적 개인으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모든 변인들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무균실 진공상태의 실험체가 아니다. 학생들은 성장과정 속에서 한국사회의 다양한 계급 및 계층의 관행과 전통들을 내면화하고 아비투스화한 존재들이다.

 한국사회는 국가와 재벌을 중심으로 한 군부독재 정권의 근대화 과정을 통해 메리토크라시화(능력중심주의화)한 사회이다. 기득권층(혈연, 지연, 학연의 씨족공동체)에게 유리한 능력을 중심으로 한 경쟁체제와 승자독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이다. 할아버지의 자산, 아버지의 높은 소득, 어머니의 정보력, 자녀의 능력을 중심으로 명문대에 입시에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모든 명예와 부, 기회, 인정을 독점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이다. 능력 경쟁에서 실패한 이들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 권리, 연대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며, 잉여인간으로 낙인찍고 모욕하는 사회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의 인정투쟁에서 실패하고 낙오되는 양극화된 사회이다.

 기득권층에 유리하게 설정된 능력을 중심으로 모든 인정관계가 구성되고 능력경쟁에서 패한 자들에 대한 모욕, 인격 존엄성 훼손 등이 빈번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의 기계적 도입을 통해 진로 선택의 과정을 앞당기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학생들은 능력중심주의 현상에 따른 인간 존엄성 훼손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저항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능력을 인정받기 쉬운 교과목을 선택하고 그런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데 집중하게 될 확률이 높다.

 요즘 케이블 방송을 통해 제작되고 있는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들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상 상황 대처 능력을 키운다는 명목 하에 우중(雨中) 칼 군무를 연습했다. 수치심을 견디는 것도 능력이라며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격한 안무를 추었다. 참는 것도 능력이기 때문에 인권 침해적 상황조차 자발적으로 감내한다. 방송사와 기획사들은 청소년참가자들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외면한다.

 그렇다면 이런 부작용들이 예상되므로 고교학점제 도입을 중단하고, 예전처럼 국가가 모든 교육과정을 구성해서 제공하며, 학생들은 이를 수동적으로 이수하게 해야 할까? 그것은 답이 될 수 없다. 국가는 거대관료체제로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에서 급속도로 진행되는 다양한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 그리고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과정을 어떤 선택권도 없이 수동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정책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 민주시민으로서 주체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능력 함양을 방해할 뿐이다.

 따라서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거나 또는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은 학교를 민주시민의 자치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교육정책이다. 학생들이 학교 공동체의 주인이자 민주시민으로서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원 개개인들의 인격의 존엄성 존중과 자유, 평등 권리의 동등한 실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경험을 하도록 지원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에 대하여 학습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능력중심주의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와 시장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꿈과 끼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구성할 수 있는 민주적 사유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런 학생들의 선택과 결정이 존중될 수 있는 대학 평준화(공동선발-공동교육-공동학위) 등의 구조개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능력 중심’ 비판할 사유 능력 길러야

 심리학자 미드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바라본 자아와 타자가 바라본 자아와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인격을 형성한다. 인격은 양자의 지속적인 긴장과 협력을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형성 방식은 주체적 인격 형성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헤겔은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형성방식을 인정투쟁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간을 홉스식의 고립된 원자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 상정하고, 인격형성 즉 자아정체성 형성 과정을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에서 ‘인정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한다. 인간은 가족들과 만나고, 시민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관습과 전통, 법, 제도들을 경험하며 주고받는 인정투쟁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족 관계 속 사랑, 사회 속 권리, 국가 속 연대의 인정투쟁을 실천하며 자아정체성을 형성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관계에 기초한 구체적 욕구주체에서 출발하여 사회 속 권리인격체를 거쳐,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주체까지 세 가지 모두를 포괄하는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인간은 정서적 안정감 위에서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누림으로써 존중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가치를 지닌 한 개인으로서도 인정받아야만 좋은 삶,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김동혁<전교조 광주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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