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스플래인이라는 용어로 유명한 리베카 솔닛의 새로운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2015년 한 스탠퍼드 대학생이 의식을 잃은 여성을 성폭행 했다. 피해자는 재판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하지도,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사람들과 소통하지도 못했습니다. 퇴근하면 으슥한 곳으로 차를 몰고 가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비명을 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질렀을까? 자신의 분노와 힘듦을 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지 못했을까?(왜 그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을까?)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최근 본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대한 감동은 참 오래 남는다. 그동안 개봉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그린 영화는 당시 ‘소녀’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성적 노리개로 유린당하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혹은 역사적 사실로 그려진 이야기를 많이 보아온 터라 이 영화는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나갈 것인지 궁금했다. 시작은 일본군 ‘위안부’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주인공 이야기로 시작해 영화 말미에 유엔에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speak)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녀가 침묵을 깨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엄마랑 ‘위안부’에 다녀온 것을 평생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살고자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 죽지 않고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다’라는 위로의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님에도 우리 사회는 (강간이나 성노예)피해자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안겨줌으로써 완벽한 침묵을 선택하도록 한다. 수치심을 주는 것은 최고의 침묵시키기 수단이다. 침묵은 폭력을 옹호한다.

 최근 지역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빗댄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된 발언은 ‘너희들도 위안부처럼 될래?’와 ‘(위안부)가 끼가 있으니까 따라갔다’라는 말이었다. 이 두 발언의 공통점은 발언자(가해자)가 수치심과 자기의심을 작동하게 해 듣는 상대(피해자)에게 내면적 침묵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었을 때 피해자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자신들이 당한 일과 분노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기게 된다. 다행히 이번 두 사건은 침묵해서 들리지 않을 뻔 했다가 침묵을 깬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은 정보 카르텔서도 소외

 또 다른 예로 어떤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여성 정치인은 자신은 정말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동료 남성 정치인과 비교하면 지역 돌아가는 정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정치를 계속 할 것인가에 대해 되돌아보는 과정에서도 이런 소외가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대부분 저녁 술자리에서 얻어지는 정보는 남성(의원) 카르텔을 만들어 냄으로써 여성(의원)들을 침묵시키는 기제가 되곤 한다.

 아이 캔 스피크-나는 말할 수 있다. 누구나 말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여성들은 낮은 위치성으로 인해 침묵을 선택해야만 했고, 아무리 외쳐도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적기도 했다. 이제 그 어려운 침묵을 깨고 나온 사람들에게 비난과 수치심 대신 이렇게 이야기 해는 것이 어떻까? “나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서로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백희정<광주나비 대표·광주여성민우회 정책센터장>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