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7일, 촛불집회 1주년이다. 2만 명으로 시작된 첫 집회는 23주 동안 이어지며 연인원 1700만 명 참가라는 미증유의 기록을 남겼다.

 숫자보다 의미있는 건 촛불집회가 질적으로 변화시킨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다.

 광장이 열렸고, 국민은 진정한 주권자로 섰다. 민주주의가 한단계 성숙한 계기로도 충분했다.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뽑고 주권을 위임해온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이 직접 정치의 감시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국정 농단 당사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사과하고, 특검이 출범하고, 공범들이 사법처리되고, 대통령이 탄핵된 일련의 과정은 ‘피플 파워’로 불릴 법한 참여 민주주의의 성과였다.

 이렇듯 광장에서 싹틔운 참여 민주주의의 과실은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권고안을 제출한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위원회가 그것이다.

▲ 대의제서 참여 민주주의로

 학습과 토론이라는 숙의과정을 거쳐 충분히 정보를 습득한 국민들에 의한 의사 결정이 이뤄졌다.

 “의회를 무시하고, 정치적인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할 새로운 광장이 열렸다는 성과도 분명하다.

 직접 민주주의의 역사는 고래로 거슬러 2000년이 넘지만, 그 결정이 꼭 민의의 올바른 대변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장을 닫지 않는 게 중요하다. 갈등하고 토론하면서 민주주의 요람이 되기 때문이다.

 BC 510년 무렵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서 시행한 도편추방제가 이를 반증한다.

 아테네 민회는 해마다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는 투표 방식으로 추방 대상자를 결정했다. 독재를 막기 위한 견제 장치였다.

 이때 민회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이 참여했다. 여성과 노예를 배제한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회원인 아테네 성인 남자 3~4만 명이 국정에 참여한, 직접 민주주의의 시발이었다. 실제 민회에 참석해 표를 행사한 사람은 1만 명 정도라고 알려진다. 한 사람을 추방하기 위해선 5000~6000표가 필요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어느날 아테네 정계의 거물인 아리스티데스가 도편추방 투표장에서 한 남성의 부탁을 받았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글씨를 쓸 줄 몰라서요.” 아리스티데스인줄 모르는 시민이 당사자에게 추방 투표용 도자기를 내민 것이다.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내가 내민 도자기에 자기 이름을 써 줬고, 그해 추방됐다.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민중의 결정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어서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 결과도 많다. 해서 이 제도는 시행 100년만에 폐지됐다. 도편추방제는 없앴지만 광장 자체를 닫지 않은 게 아테네의 성숙한 의식이었고, 토론하고 조정하는 광장 민주주의로 발전했다.

▲ “광장 닫히면 필요한 건 밀실 뿐”

 28일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는 광화문 뿐만 아니라 여의도에서도 열린다고 한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기록기념위원회’ 주최 광화문 1주년 집회가 청와대 행진 계획을 밝히자 ‘촛불 민심은 청와대가 아닌 국회로 향해야 한다’는 논란으로 번져 촛불이 쪼개진 것이다. 이미 여의도 집회 신고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광장이 닫히면 필요한 건 밀실과 벗뿐.”<광장/최인훈> 작가는 이데올로기로 물든 광장에선 발 뒤디딜 틈이 없기에 밀실을 갈구했다. “아무도 광장에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은 비어있습니다.<중략>” 그리고 작가는 “광장이 닫히면 타락한 밀실만 푸짐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2017년 ‘정권 교체’를 실현한 우리네 광장엔 아직도 사람이 가득한가? 개개의 욕망으로 뒤틀려 다시 닫히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채정희<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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