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미투운동으로 인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정신적 충격과 혼란에 싸여있다. 박근혜 탄핵에 이어 미투운동은 마치 국민들에게 정신 차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 같다. 뉴스가 아닌 실제하는 물리적 충격을 받은 느낌까지 든다.

 미투운동은 진실공방의 과정에서 사실이 무엇인지, 가해자들이 어떤 처벌이 받을지, 이후 어떠한 형태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는지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미투운동이 무엇을 지향해야하는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일시적 가십거리로만 취급받다가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향해야하는지가 중요

 2017년 미국에서 배우 ‘알리사 밀라노’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되었던 미투운동만으로 한국의 미투운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의 미투운동은 정치적 변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미투운동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존재하던 다양한 권력문제들을 파헤치는 흐름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강원랜드 채용부정사건’, ‘박찬주 대장과 아내의 갑질논란’ 등은 박근혜 탄핵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다양한 부정부패문제에 대한 문제인식으로 인하여 촉발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채용, 군과 경찰에서 장병들의 사적 사용 등의 문제는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존재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문제제기 하지 않았던 주제였다.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사람들의 도덕적 감수성이 큰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도덕적 감수성의 발달은 혼란을 단지 혼란으로만 그치게 하지 않고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고양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것은 세계관의 변혁을 가져오고 있는 중이며, 과거 단순한 경제적 발전, 정치권력의 교체와 비교할 수 없는 더욱 가치 있고 혁신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세계에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권력의 해체와 재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미투운동의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권력오용에 대한 학습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이다. 먼저 학습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안태근 검사, 고은 시인, 이윤택 연출가, 김기덕 감독 등의 보인 행태를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단지 남성의 본능이라는 개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일종의 학습의 결과이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집단, 조직에서 발생하던 폭력을 관찰하고, 그 폭력이 처벌로 이어지기보다 무마되고, 심지어는 고무 받는 과정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동일한 폭력을 실행에 옮기고, 타인들에게 보았던 결과를 자신들도 체험하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폭력성에 무감각해지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권력오용의 관점, 정신분석 관점

 다음으로는 정신분석의 관점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한국사회의 성문제는 문명이 성본능을 적절히 조절하는 기제의 실패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문명을 본능과의 갈등, 본능의 희생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본능을 사회에 비파괴적으로 이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능을 스스로 이해하고, 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승화하는 질적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프로이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사회는 본능의 승화에 실패한 것이다.

 사드라는 작가는 참으로 흥미롭다. 간혹 변태성욕의 대명사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는 사회가 지닌 악함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했던 것 같다. 그의 소설 ‘악덕의 번영’에 나오는 여주인공 쥐스틴은 부모의 죽음 이후 큰 어려움에 처하지만, 종교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코 악행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신부나 귀족 등은 그들의 겉모습과 다르게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 쥐스틴을 착취한다. 반면 그녀의 언니는 부모님의 죽음 이후 바로 매음굴로 들어가 악행을 통한 성공의 길을 간다. 두 자매의 선택은 기대와 달리 선한 동생에게는 반복된 불행이, 악한 언니에게는 지속적인 행운이 이어진다. 선한 쥐스틴이 만난 악인들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 세상이 모두 선하다면 나 또한 선한 행동을 하겠지만, 이 세상이 모두 악하다면 나의 선한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고? 이 소설의 마지막은 충격적이다. 언니 쥘리에트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구원을 받고 천상에 오르지만, 동생은 갑작스러운 뇌우에 맞아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선함을 추구하던 동생이 왜 천벌을 받아야하는 것일까?

 이는 이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인간사회의 선함이 신에 의해 구축되지 않으며, 결국은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 형성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투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단순히 소수의 미투 고백만으로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투운동이 갖는 의미를 반복적으로 고민하고, 과거의 관습을 고치려는 지속적인 노력만이 그와 같은 악덕이 더 이상 번성하지 않게 할 것이다.
060-526-1250.

정의석 <지역사회심리건강지원그룹 모두(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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