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이력을 정리해 봅니다.

 광주서중 3학년인 60년대 독서회를 창립해 활동하고, 대학생인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보안수사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군의관 시절인 77년 전북 이리(익산)역 폭발사고땐 위수지역을 이탈해 사고 현장에 달려가 인명 구조에 나섰습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 국가 폭력 현장을 목도한 뒤 시민운동에 나섰습니다.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80년 5월 진상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고, 5·18 진상 규명 촉구와 책임자 처벌을 위한 사회 운동에 나섰습니다.

 87년엔 광주·전남사회문제연구회를 창립했는데, 시민·사회운동의 방향을 거리 투쟁에서 지역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연구 활동으로 전환하고자 함이었다고 합니다.

 88년 조선대학교 학원민주화 운동 당시엔 수습위원으로서 민주동우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늘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
 
 89년 조선대학생 고 이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시민대표측 부검 참관의로 들어가 단순 익사사고가 아니라는 의학적 소견을 밝혔습니다.

 89년 영광원자력발전소 건설노동자 가족의 ‘무뇌아 사산 사건’을 계기로 환경공해연구회를 결성했고, 이는 92년 광주환경운동연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93년 5·18민주화운동 성역화를 위한 광주시민연대모임을 창립하고 상임대표가 됩니다. 시민모임은 5·18의 국가 기념일 지정과 구묘역과 신묘역의 성역화를 추진했습니다.

 시민모임은 이듬해인 94년엔 ‘해외에서 본 5·18민중항쟁’ 국제심포지엄을 엽니다. 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외국인들이 광주에 와 당시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95년엔 반인류행위와 과거 청산 국제심포지엄을 열어 국가권력의 집단적 인권 유린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보상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96년 5·18정신 계승을 위한 국제 청년 캠프를 열었고, 97년엔 5·18특파원 리포트 ‘Gwang ju In The Eyes Of World’를 출간합니다.

 광주YMCA 이사와 이사장, YMCA 시민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한국YMCA 이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광주·전남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를 창립하고, 광주·전남 남북교류협의회를 통한 긴급 식량 지원사업도 전개했습니다. 희망의 농기계 보내기 운동이 대표적인데, 경운기 200대, 콤바인 100대, 벼이양기 100대 등 총 40억 원 상당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인권 운동과 관련, 99년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 아시아인권헌장 제정 및 선언을 이끌어냅니다. 2001년엔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인권위원회 이사로 선출됐습니다.

 필리핀 태풍, 파키스탄·네팔 지진, 스리랑카 쓰나미 등 아시아 지역에서 재난이 발생할 때 긴급 출동해 의료를 지원하고 구호 활동에도 앞장섰습니다.

 2006년엔 아름다운가게 광주·전남 대표, 이어 전국 대표를 맡아 광주·목포·순천·여수·광양 등 우리 지역의 나눔과 순환 운동 거점 확산을 도왔습니다.

 앞서 97년 IMF 외환 위기땐 금호타이어 회생을 위한 구조조정 갈등 중재에 나섰습니다. 이때 노·사·민·정 상생모델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게 후일 ‘광주형 일자리’의 모델이 됐다고 회고합니다. 98년엔 ‘기아자동차 살리기’를 범시민운동과 연계해 진행했습니다.

 광주전남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광주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 광주국제교류센터를 창립했습니다.
 
▲“이쯤해서 광주를 놓아야겠네”
 
 다름 아닌 윤장현 전 광주시장의 과거사입니다.

 ‘현재’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주시장 재임 당시의 공과가 확연합니다. 최근 열린 항소심에서도 선거법 위반 혐의를 벗지 못했으니 ‘위법’의 죄책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일생 시민사회운동으로 살아온 그를 정치 무대로 호출해 부여한 ‘시민시장’이라는 타이틀에 부족함 없는 ‘족적’임도 부인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천생 ‘광주 사람’이었던 그가 최근 떠났습니다. 의사라는 본업으로 돌아가 새로운 일터가 된 제주도로 온 가족이 이사간 겁니다.

 “탯자리이자 일터였고 꿈을 펼쳐왔던 광주에서 묻힐 때까지 함께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는 세계도 바꿔 보고, 노동의 신성은 늘 소중한 것이니 이쯤해서 광주를 놓아야겠네.”

 윤 전 시장 심경의 일단을 누군가와 나눈 SNS 메시지에서 확인합니다.

 “이제 환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아저씨 같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며 타향살이 나선 윤장현 전 시장. 광주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까요?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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