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도시'의 추억 10.8km]
푸른길가꾸기운동본부·광주드림 공동기획

▲ 연탄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대인동 오연 2길.

 길을 통해 사람이, 물품이 모이고 만난다. 얘기도 오가고, 물품도 교환된다. 그렇게 길은 인간의 삶,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요즘처럼 자동차 등 개인의 이동수단이 발달하기 전, 대규모의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기차의 등장은 도시화에 영향을 미쳤다.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역 중심으로 사람이 북적였고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기찻길들은 없어지기도 했고, 다른 곳에 새로 생기기도 했다. 폐선부지를 푸른길로 가꾸고 있는 광주푸른길가꾸기운동본부와 광주드림(이하 기찻길팀)은 `없어진 기찻길’을 중심으로 광주의 근대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본다.기찻길팀은 광주YMCA좋은동네시민대학 최봉익 위원장, 푸른길운동본부의 이경희 국장, 전남대 조경학과 조동범 교수, 정선휘 작가, 목포대 김미향 교수 등이 참여한다.

 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건축물들에서, 광주의 과거 모습을 더듬어본다. 또한 그 공간의 현재 모습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1950년 광주역과 광장 모습.  <사진 출처=빛고을 백년사 >
 ▲ 1950년 광주역과 광장 모습. <사진 출처=빛고을 백년사 >












1952년 새로 지어진 광주역.  <사진 출처=빛고을 백년사>
 ▲ 1952년 새로 지어진 광주역. <사진 출처=빛고을 백년사>












 ▲ 1969년 광주역이 북구 중흥동으로 이전하면서 역은 동부소방서로 바뀌었다.





 ▶현 동부소방서는 옛 광주역

 기찻길팀이 지난 2일 첫번째로 답사한 곳은 옛 광주역(현 동부소방서)에서 나무전거리. 1921년 4월 광주역사가 준공되고 광주~송정간 철도 개통에 이어 광주~담양간 철도가 1922년 12월 개통됐다.

 광주에 철도가 처음으로 놓인 것이 1921년~1922년이다. 현 동부소방서의 모습은 52년에 새로 지어진 광주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을 당시 목조 건물이었던 광주역이 한국전쟁 중 공습으로 파괴됐다고 한다. 광주역은 69년 북구 중흥동으로 이전했다. 

 

 ▶광주로 광주로

 동부소방서 옆에 들어서 있는 것은 대인시장. 광주역 주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현재 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 광주역의 규모와 대인시장에 남아있는 그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상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동부소방서 자리가 대합실이었고, 대합실 주변으로 승무원 관사, 열차를 정비하는 기관고, 석탄을 저장해 놓는 저장고들이 있었단다.

 광주에 철도가 생기면서 전라남도의 중심인 나주는 쇠퇴하고 광주는 새로운 중심지가 됐다. 광주의 인구수를 보더라도 1916년 광주면의 인구는 1만860명이었는데 1945년 8만3000명으로 늘었고, 60년 30만9475명으로 증가했다. 도시화가 되면서 전남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광주로 모였고, 광주역 주변인 계림동·동명동·대인동 등에 터를 잡았다.

 “살아보려고 도시로 오고 도시로 오고 한 것이지. 그 사람들이 교통이 편한 광주역 근처로 모인 것이고 역 주변에 살면서 석탄 혜택도 봤어. 석탄찌꺼기를 구해서 흙하고 배합해 연탄으로 사용했어.” 대인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61)의 설명이다.












광주역이 이전하고 그곳에 대인시장이 들어섰다.
 ▲광주역이 이전하고 그곳에 대인시장이 들어섰다.



 ▶기차가 떠난 뒤 북적였던 70·80년대

 1969년 북구 중흥동으로 광주역이 이전하고 나서 그곳은 시장으로 커갔다. 역 이전 전에도 교통편이 좋아 “머리에다 이고 기차 타고 와 과일도 팔고, 감자도 팔고” 그랬는데 이전 후 부지가 개인들에게 분할 매각됐고, 시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대인시장 가게들 중 기찻길처럼 길쭉한 모양을 한 건물이 있다. 기찻길도 분할 매각되면서 가게 모양이 그렇게 된 것. 현재는 제분소가 운영되고 있지만 이전에는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사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찻길 식당’으로 불렸다고.

 기차로 인해 도시화가 진행된 광주역 주변의 영화는 폐선 이후로 본격화됐다. 기차에 이어 `버스’라는 또다른 대중교통수단이 등장했고, 시외버스터미널이 대인시장 맞은편인 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들어서면서 대인시장을 비롯한, 그 주변 길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80년대에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했어. 장사도 잘 되고 시장 주변에 방도 잘 나갔어. 탈없이 5남매 다 키웠지.”

 나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다 35년 전 광주로 이사와 대인시장에서 터 잡고 살고 있는 김복내(69)씨의 말이다.

 









자동차 뒤편으로 가게가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기찻길 부지를 그대로 분할받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뒤편으로 가게가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기찻길 부지를 그대로 분할받았기 때문이다.



 ▶터미널도 가고, 시청도 가고

 대인시장 안 오연2길은 광주의 과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오연 2길에 늘어선 가게 건물 뒤편에는 연탄을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1975년 준공’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서모(63)씨는 “이쪽이 충장로에 이어 제 2의 `본정통’이었다. 장사가 하도 잘 돼 학생들 교복까지 팔았는데 이제는 가게가 나가면 채워지질 않는다”고 말했다.

 연탄 화로에 대해 묻자 서씨는 “처음에는 도르래식으로 바퀴 달린 기구에 연탄을 놓고 쭉 밀어넣었는데 연탄 보일러식으로 바뀌고 이제는 전기 판넬을 쓴다”며 “난방은 이렇게 발달했는데 이 곳은 거꾸로다”고 말했다.

 90년대 초 시외버스터미널 이전, 백화점 등장, 구시청 이전 등 도시의 확장, 소비의 변화로, 70·80년대 중심가였던 이곳은 구도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엔,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계림5거리에서 담양으로 가는 기찻길과 여수


로 가는 기찻길이 나뉘었다. 나무전거리 입구에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계림5거리에서 기찻길은 둘로 나뉘고

 광주역에서 전남 지역으로 가는 노선은 두 개가 있었다.

 광주~담양간 철도와 광주역에서 출발해 남광주역을 거쳐 화순·순천·여수로 이어지는 광주~여수간 철도. 기찻길이 나뉘는 곳은 현재의 계림 5거리. 나무전거리가 형성돼 있는 계림오거리길이 담양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경양로가 여수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광주~담양간 철도는 1944년 태평양전쟁의 군수물자 제작을 위한 금속회수령에 의해 철거됐다.

 광주~담양간 철도가 있기 전부터 계림 5거리 주변은 나무로 유명했다. 화순 일대에서 가난한 나뭇꾼들이 무등산에서 `땔감’을 마련해 이곳에서 팔았다 한다. 이 철도가 없어지고, 60년대 가정용 주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본래의 시장기능을 상실했다가 헌나무와 문짝시장이 형성되면서 문짝거리로도 통했다. 현재는 다양한 건축자재들의 거리로 그 모습을 달리했다.   조선 기자 su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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