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부터 극장입니다”
이후 현대·한일극장도 천변에 문 열게 해

▲ 태평극장은 구도심의 번화가 충장로를 잇는 중앙로 입구에 1957년부터 2002년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지금은 공사가림막에 가린 채 폐허 모습이다.

문닫은 채 건물만 남은 광주시내 극장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역시 태평극장이다.

구도심 번화가인 충장로를 잇는 중앙로에 자리잡아 노출이 많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건물 외벽에 남아 있는 “1957년부터 극장입니다”라는 글귀 때문일 게다.

하지만 지금의 극장 모습은 폐허 그대로다. 공사가림막으로 둘러쳐진 채 안쪽은 각종 쓰레기더미로 가득하다. 한때 약속장소로 이용됐던 현관 앞 의자에도 먼지만 켜켜이 쌓여 있다.

태평극장은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맞아 광주에 잇달아 등장한 극장들 중 하나다. 시내에 동방극장(현 무등극장)과 광주극장 둘 뿐이던 시절을 지나, 지금의 금남전자랜드 자리에 있던 신영극장(옛 대한극장)과 동구 금동의 남도극장(현 주차장)에 이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약창고자리에 1957년 재개봉관으로 문을 연 이래, 천일·계림·중앙극장 등이 잇달아 문을 열었으니 광주의 극장사에선 고참급이다. 역시 지금은 문 닫은 현대·한일극장도 태평극장 이후 줄줄이 광주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극장들의 천변선호에 대해 박선홍씨는 ‘광주100년사’에서 광주천변 중심의 상권형성에 따른 유동인구증가를 원인으로 꼽은 바 있다.

충장로에 상권이 잡히기 전인 1920년와 30년대엔 천변 일대에 개인 영세상인들에 이어 ‘사정시장’이 형성되면서 태평극장 앞을 지나는 유동인구가 많았다는 것.

‘광주의 극장문화사’를 쓴 위경혜씨는 “당시 태평극장의 주요 관객층은 전남방직과 무등양말공장의 노동자, 자영업 등의 상업을 하던 30~40대 중장년층이었다”며 “이후 1963년 냉난방 시설과 수세식 화장실 설치 등 시설개선 후 개봉관으로 등급이 상승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 극장들은 침체기를 맞는다. 1970년대 유신이 가져온 영화산업의 침체와 TV의 등장이라는 ‘보편적 악재’가 첫번째 이유다.

여기에 태평극장의 경우 1960년대 주요 고객층을 형성하던 전남방직과 일신방식 노동자들이 지금의 일신방직 사택 건너편에 들어선 문화극장(1965년 개관)으로 발길을 옮긴 것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76년 대인동에 등장한 ‘시외버스터미널’은 기존 물류와 인구의 동선까지 바꿔놨다.

태평극장은 90년대초 대대적인 시설보수를 거쳐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이번엔 멀티플렉스의 바람이 거셌다. 1999년 충장로 5가에 엔터시네마가 7개 스크린으로 복합상영관의 시작을 알렸고, 이에 무등·제일극장 등이 잇달아 변모를 시도했다. 하지만 태평극장은 2002년 4월 개봉작 헐리우드영화 ‘블레이드2’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지금도 당시 포스터가 극장 입구에 붙어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이미 2000년도에 근로복지공단 광주본부와 광주·전남우유협동조합으로부터 압류와 해제, 강제경매결정과 취하조치가 반복됐고, 결국 2002년 9월 주식회사 투더월드라는 서울소재 기업에 팔린다.

이 회사는 광주시의 ‘광주근대문화유산 목록화 조사보고서’(2003)를 위한 조사당시까지만 해도, 극장건물 철거 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을 짓는다는 계획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

이후 태평극장은 2005년 8월 공영주차장으로 바뀔 뻔하기도 했다. 당시 동구청은 지방세 체납을 이유로 극장부지에 대해 압류를 걸어놓은 상태였는데, 마침 광주천 생태환경복원 사업에 따라 천변주차장을 폐쇄키로 하면서 이를 대체할 공영주차장 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역시 계획발표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극장부지는 2006년 경매에 넘어갔고 시와 구청은 지난 4월 태평극장 인근 천변에 새로 공영주차장을 지었다.

문을 닫은 이후 계속된 철거위기와 경매 등의 세파에 휘말려온 태평극장은, 지난해말 호텔업을 겸하고 있는 서울소재 특급종합건설주식회사 소유로 넘어가 있는 상태다.

이광재 기자 jajuy@gj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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