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뽕뽕다리. 뽕뽕다리는 구멍 뚫린 공사장용 철판을 다리의 상판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1973년 현재의 발산교 건립 이전에 있었던 다리로 인근의 방직 공장 여공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이 다리는 1975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발행 `光州’ 제공>

전방·일방 등 방직공장이 직공들의 복지를 위해 기숙사와 사택을 운영했지만 전체 직원들을 다 수용할 규모는 되지 못했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여사원들은 방직공장 근처에서 자취를 했는데, 임동과 신안동 일대가 이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여사원들 중 일부는 광주천 건너 발산 동네에 방을 얻기도 했다.

광주의 빈민지역으로 불렸던 곳으로, 방값이 쌌다.

미혼의 여사원들이 그곳으로 흘러든 이유는 바로 그 돈 때문이었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남자 형제들을 공부시켜야 했던 짐을 졌던 이들이기에 한푼이라도 아끼는 선택을 마다할 수 없었던 것.

발산에 거처를 정한 여사원들에겐 출퇴근길 광주천이 가로 막고 있었다.

변변한 다리 하나 없던 시절, 광주천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뽕뽕다리였다.

건축 공사장에서 쓰는 구멍 숭숭 뚫린 철판을 이어 임시로 가설한 다리였다. 여사원들에게 구멍이 뚫린 다리 건너기는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멋부릴 욕심에 신었던 하이힐은 구멍에 걸리기 일쑤여서 스타일 ‘제대로’ 구겼다.

어쩌다 치마라도 입은 날이면 다리 밑 불량한 시선 때문에 얼굴이 화끈 거리는 수모를 감당해야만 했다.

“총각들 뽕뽕다리 밑에서 짖궂은 짓 참 많이 했지.” 김승중 씨의 회고다.

지금 뽕뽕다리는 없다. 대신 그 자리엔 비 한 방울 새지 않는 단단한 석조 구조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름은 그대로 발산교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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