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3000명 직원이 300명으로
70년대 최대 호황 입사는 `하늘의 별’

▲ 실이 뽑아져 나오는 과정.

영암의 한 마을에 선전단이 떴다. 1940년 대로 기억되는 어느 날이다.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거야.”

그 마을에서만 4명의 젊은 여성들이 따라 나섰다. 그 중 제일 어렸던, 당시 열 서너 살의 최모(80) 씨 일행이 도착한 곳은 광주 임동의 종연방직(전남방직의 전신) 공장이었다.

“공부 욕심이 있었던 차라 끌리더라고. 부모님 모르게 보따리를 쌌지.” 하지만 그는 넉 달을 못버텼다고 했다.

공장 밖 출입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지 못했다. 솜을 타는 작업장은 먼지가 자욱하니 숨이 막히는 듯했다. 배움이 짧았던 여사원들인지라 임금 역시 형편없이 낮았다. 직공들의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탈주가 빈번했던 시절이었다.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외출을 못해봤으니까.”

어찌어찌 해서 부모님이 알고 면회를 왔다. “그 시간마저 엄격하게 제한돼 있었노라”고 최 씨는 기억했다.

약속했던 학업의 기회도 갖지 못했다. 희망을 안고 들어왔던 공장에서 절망만 확인했다. 결국 담을 넘었다.

“새벽에 근무하러 가는 척하다가 같이 간 언니 한 명하고 도망쳐 나왔지.”

변변한 기업체가 없던 시절 방직공장은 최대의 직장이었다. 종방만 해도 창립 당시인 1935년 당시 고용인원이 3000명이었을 정도로 큰 기업이었다.

임금·근무여건 등 처우는 열악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공장을 세웠던 배경 역시 그런 조건을 활용하겠다는 의도였으니 오죽했을까.

이 땅의 누이들은 그런 처지를 견뎌냈다.

가난한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오빠·남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던 숙명과도 같았던 짐이 그들의 몫이었던 탓이다.

그런 일자리라도 있었음에 고마워했던 이들도 많았다.

자신을 계발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인 ‘주경야독’은 이런 이들의 열매였다.

최 씨의 큰 딸, 김모(50) 씨도 방직공장에서 근무했다. 70년대 후반 쯤이었다.

전남방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영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엄마 세대와는 달라진 환경이었다.

당시에도 방직공장은 광주·전남에서 첫 번째 사업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동호 광주공장장에 따르면, 70년대 광주·전남 기업 중 종업원이 1000명 이상인 곳은 5~6곳에 불과했다. 전남방직(3200여 명)·일신방직(2800여 명)이 최대 규모로, 두 곳을 합하면 6000여 명에 달했다. 이어 아시아자동차, 삼양타이어, 로케트전기 등이 손에 꼽을 만했다.

60년 대에서 70년 대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섬유산업은 최고 호황을 누렸다.

“70년대 중반 수출 1억 달러를 최초로 달성한 기업이 한일합섬입니다. 지금은 최고라는 삼성·현대는 비교대상도 아니었죠.” 이동호 공장장의 ‘그 때를 아십니까’다.

이 시절, 방직회사 입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30년 경력의 이승중 씨는 “경쟁률 10:1은 예사였다”고 말한다.

기숙사·사택이 제공되고, 수영장·영화관 등 문화시설에, 무료 교육에 이르는 풍부한 복지 혜택도 경쟁률을 높였다.

 

 

 

 

 

 

 

 

 

 

 ▲ 새끼처럼 꼬아진 솜이 더 단단한 실이 되기 위해 다음 작업과정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사원들의 경우엔 바로 정직 채용이 어려웠다. 남사원 사택에서 식모살이 3~4년을 하고서야 직원으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순목 노조위원장의 회고다.

중학 졸업생인 김 씨가 방직공장에 취직한 게 바로 이런 시기였다.

입사 동기는 엄마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돈도 벌면서, 못다한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었다.”

당시 전남방직은 이런 직공들의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해줬다. 방직공장 내에서 산업체 특별학급이 운영된 것. 고교 과정 이수가 가능했다.

“전남방직이 설립한 전남중·고 교사들이 특별학급에 와서 수업을 했죠.” 70년 입사, 2003년 정년퇴직한 오성균(한국노총 전남본부 사무처장) 씨는 “61년 분사된 전방과 일방이 각각 12학급씩, 모두 24학급이 특별학급으로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성적 순으로 입학했는데, 21~22살 먹은 ‘누나 고교생’들도 많았다.”

김 씨도 방직공장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70년 대 섬유산업 호황기를 지나고 정부는 조선·화학 등 중공업 육성에 전력을 쏟았다. 이렇게 되자 80년 대 들어 방직공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직공들의 이직이 본격화됐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떠오른 샛별 전자 산업이었다.

일손 부족에 시달리던 방직공장들은 이직을 막기 위해 대학(2년제)까지 무상교육을 시키는 등 혜택을 늘렸지만, ‘방직공장 엑소더스’를 막지는 못했다.

한 때 3000명의 직원이 북적대던 전방 광주공장은 이후 직원들이 계속 줄었고, 현재는 300여 명에 불과하다.

전성기 때완 많이 달라진 환경이다. 기계화로 수작업이 준 것이 큰 요인이다. 직원은 줄었지만 생산량은 그때와 큰 차이 없다는 실적이 이를 반증한다.

한 때 떠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지금은 돌아오는 시대가 됐다는 것도 변화상이다.

이직이 거의 없어지면서, 입사는 다시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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