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광주·전남 6월 항쟁사
5월18일 가장 먼저 국민운동본부 결성
6·26 대행진 광주 40만 명 참가 “전두환 정권 퇴진” 외쳐

▲ 고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이 치러진 1987년 7월9일 수많은 광주시민이 거리로 나서 고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광주·전남 6월 항쟁 기념사업회 제공>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등 민주헌법 쟁취라는 결실을 맺은 1987년 투쟁을 선도했던 것은 광주·전남이었다.

 6월 항쟁의 뿌리가 5·18민중항쟁이었듯 광주·전남은 전두환의 임기 말인 87년을 누구보다 먼저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광주·전남 6월항쟁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조선호 사무처장(이사)은 지난 8일 “6월 항쟁은 철저히 계획된 투쟁이었다”며 “5·18 이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을 지속해온 광주는 86년 5·3인천민주항쟁을 계기로 직선제 등 민주헌법 쟁취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자 87년 투쟁을 준비하는 데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87년 투쟁에서 광주·전남은 전투력의 절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전남의 6월 항쟁사는 서울·부산 등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광주·전남의 6월 항쟁사를 정리했다.
 
‘개헌 추진위 현판식’ 옛 도청 최대 인파
▶6월 항쟁 전조(87년 1월~4월12일)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광주YWCA에 고 박종철 분향소를 설치했다. 광주를 비롯해 전남에서도 추모위원회가 구성돼 추도대회, 추모기도회 등이 잇따라 열리게 된다.

 특히, 2월18일에는 ‘고문추방과 민주화를 위한 애국도민운동’ 기구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3월3일 도심에서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이 진행됐다.

 노동자로 한얼야학에서 활동한 표정두 열사가 3월6일 서울 미국 대사관 앞에서 “광주사태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한 것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편, 1986년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각 시도별 현판식’ 행사를 계기로 87년 3월30일 광주에서도 전청련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역 현판식인 선전집회를 개최했다. 80년 5월 이후 전남도청 분수대 광장에 최대 인파가 몰린 집회로 기록돼 있다.

 전두환 정권의 종식과 민주헌법 쟁취를 향한 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전남대 호헌 철폐 투쟁 선포식
 ▶4·13 호헌 조치, 청년·종교계 “호헌철폐” 투쟁(4월13일~5월10일)

 4월13일 전두환이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했다. 4·13 호헌조치다.

 다음 날 전남대 학생 800여 명이 2차 학생 비상총회를 열고 정문에서 시위에 나섰다. 같은 날 광주NCC(전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는 호헌저지 성명을 냈다.

 천주교 광주교구(정의구현) 사제단 남재희 신부 등은 4월21일 카톨릭센터 6층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이는 곧 전국 14개 각 교구로 확산됐다.

 이후 27일 김병균 목사 등 전남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목회자 21명도 YWCA 6층에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5월7일엔 전남대에서 5월 학살원흉 처단 및 호헌 분쇄를 위한 5월 투쟁 선언식이 진행됐다. 1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해 23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전남 목정평 목회자 34명은 다음 날인 5월8일 12일간 단식 기도를 끝내고 4·13 호헌 철폐와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전남 노회 산하 목회자 176명과 신도 600여 명은 5월10일 서남교회에서 ‘4·13 조치 철회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원각사에 최루탄 투척…불교계 들고 일어나
▶전남 국민운동본부 결성 ‘5월 투쟁’ 본격화(5월11일~5월27일)

 피 끓는 5월. 셀 수 없는 가두시위, 경찰과의 공방전은 이미 ‘일상’이었다.

 5·18 7주기를 앞두고 지역에선 학생·노동계 등 각 분야의 시위가 활발해졌다.

 5월14일 오후 2시 20개 시민사회단체는 ‘5·18 정신계승을 위한 400만 도민 민주화 대행진’에 나섰다. 광주지역 섬유노련(노동조합연맹) 산하 4개 노조(남해어망, 광주어망, 삼양견업, 성화제망)가 4·13 호헌조치 반대 및 한국노총 호헌지지 철회를 요구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5월16일 가톨릭센터에서 5·18추모 사진전을 열었다. 5·18 관련 사진 90여 점과 영상을 가지고 ‘5·18사진전-오월 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진행, 5월의 투쟁 열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5·18 관련 사진과 비디오를 복제해 서울·부산·대구 등지로 보내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의 진실을 알렸다.

 당시 부산·대구 등에서도 활발한 투쟁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월18일 망월동에서 5·18민주항쟁 7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21개 재야 학생 단체가 ‘4·13 호헌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 쟁취 범도민 운동본부(이하 전남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그간 개별 명칭을 걸고 활동해온 단체들은 ‘전남 국민운동본부’라는 하나된 이름 아래 뭉쳤다.

 전남 국민운동본부 결성 당일 저녁 원각사에선 대한불교청년회 광주지구 주관으로 ‘고 김동수 열사 및 광주민중항쟁 희생민주영령 추모법회’가 열렸는데, 경찰이 법당에 최루탄을 투척하고 난입해 13명을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전국 불교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광주로 내려오는 등 불교계가 투쟁에 적극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 5월27일 사암연합회 주최로 원각사 법당난입 최루탄투척규탄 대법회와 노상법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1만여 명의 불교도와 시민이 참여한 것이다.

 앞서 5월24일엔 광주기독교자유수호위원회가 금남로 YMCA 앞 도로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4·13 조치 반대, 언론자유, 양심수 석방 등 시국에 대한 6개 견해가 발표됐다.

 당시 참여자들은 경찰의 행사장 봉쇄와 최루탄 투척에도 물러나지 않고 연좌기도회를 진행하며 경찰 스스로 물러나도록 했다. 그동안 금남로 진출을 제대로 한 적이 없던 상황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6월26일 광주시민 절반 40만 명 거리로
 ▶이한열 최루탄 피격, 전국에서 타오른 민주화 들불(5월28일~6월28일)

 대학생들의 가두 투쟁, 타격전, 기습시위가 끊임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6월9일 서울에서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6·10 대회를 앞두고 광주 투쟁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하며 5·18 책임자 처벌, 4·13 호헌철폐,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 등을 요구했다.

 6월10일 충장로 중앙교회 앞과 중앙로 일대를 해방구 삼아 종교계, 대학생, 고등학생, 노동자 등 5만 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는 오후 2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벌어진 시위만 30여 회. 광주 239명, 목표 26명, 순천 16명 명 등 총 281명이 연행됐다.

 전남대학생 2000여 명은 6월16일 제2차 비상총회 및 삭발투쟁에 나섰다. 김승남·박춘애 등 23명이 연좌시위·삭발, 20여 명이 혈서를 쓴 이날 청년 200~300명이 전남대 중앙도서관에서 철야농성을 한 뒤 아침에는 정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비가 내린 6월19일엔 원각사에서 ‘호헌 철폐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법회’가 열렸다. 빗속에 시민과 학생 1만 여 명이 참여했다. 구시청 사거리, 대인동 공용터미널, 학동 전대 의대 앞 등에선 격렬한 가두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이날 일어난 시위만 63회, 참여자는 4만50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고등학생들은 6월21일 ‘광주지역 고등학생 민민투’를 결성했다.

 6월26일 4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6·26 국민평화 대행진이다. 기념사업회 기록은 40만 명이지만 87년 6월28일 서울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행한 신문에는 광주 시위 참여 인원이 50만 명으로 나와있다. 당시 광주 인구는 80만 명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최대규모였다. 150만 명이 대행진에 나선 이날 광주는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인원이 시위에 참여한 곳이기도 했다.
 
 이한열 열사 영결식 30만 명 참여
 ▶6·29 선언에도 계속된 싸움, 이한열 영결식(6월29일~7월9일)

 전국민의 민주화 외침에 전두환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6월29일 노태우(당시 민주정의당 대표 겸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 등을 담은 시국 수습 특별 선언(6·29 선언)을 했다.

 오랜 투쟁 끝에 얻은 ‘승리’였지만 광주·전남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즉각 종식되지 않는 이상 수세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기만책일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

 6·29 선언 당일 남동성당에선 신도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미사가 열렸고 이후 선언 내용 이행을 촉구하는 촛불가두행진 및 연좌농성이 진행됐다.

 전남대에선 군정종식을 위한 전열정비대회와 함께 시국토론회가 열렸다. 일신방직근로자, 택시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도 이어졌다.

 7월2일 전두환은 노태우의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6월 항쟁이 끝나고 전남 국민운동본부는 끝내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를 맞이할 채비를 했다.

 7월7일 이한열 열사의 망월동 묘역 안장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고, 이날 전남대는 ‘고 이한열열사추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틀 뒤 고인의 운구차가 운암동을 통해 광주로 들어왔다.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는 30만 명이 참여했다.

 이한열 열사가 망월동 묘역에 안장된 뒤 2000여 명은 전남대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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