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총을 들었던 소년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곁에 있다

“여러분, 적십자 병원에 안치되었던,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추도식을 하던 날 동호는 상무관을 지키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교복을 입고 학교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동호는 친구를 찾고, 시신을 기록하고, 유족들에게 확인을 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공부를 하고 있었어야 할 은숙 누나와 양장점에서 미싱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선주 누나는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진수 형은 무전기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녔고, 시장의 상인들은 도청에서 나왔다는 말에 물건을 값도 받지 않고 그냥 주고 있었고, 주먹밥을 든 이들이 광장에서 시민군에게 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곳은 1980년 5월의 광주였다.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내가 5월 18일을 그냥 넘어간 적은 없었다. 언제나 학교에서 틀어주는 오래 된 영상을 봤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묵념을 하고, 시민군과 전남도청 무정부 등의 단어를 듣고 배웠다. 그러나 그 오래된 영상을 한번도 끝까지 본 적은 없었다. 무서웠다. 영상 속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서웠다.

화면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영상보다 더 가슴에 깊게 박힌 건 학교의 나이 드신 선생님들이 이따금 수업 중에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선생님도 계시고, 동호나 은숙누나처럼 중학생·고등학생이었던 선생님들도 있었다. 그분들의 이야기 중 한 여선생님의 이야기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곧장 집으로 가라며 선생님들이 일찍 수업을 마치고 보내줬다고,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다고, 밤이면 솜이불을 창문에 두르고 가족들이 함께 있었다고, 선생님의 할머니가 총알도 솜이불은 못 뚫는다고 말씀하시며 선생님을 달래셨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밤의 광주가 섬칫하도록 서러웠다.

▲그 밤의 광주, 섬칫하도록 서러웠다

작년 무더운 여름 날 저녁, 친구와 영화 ‘택시운전사’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어두운 밤이었다. 전남대학교 거리를 걸어 버스정류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는데 나도 모르게 거리를 쳐다보다가 친구 손을 붙잡았다. 내가 서 있는 거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현실로 느껴져서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사복경찰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는 ‘전남대, 말바우시장, 도청, 충장로’ 의 이름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귀에 꽂혔지만, 영화가 끝나고 그 곳에 서 있자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에서 누군가가 피 흘리고 쓰러졌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차마 그 땅을 밟고 있을 염치가 없었다.

그곳에서 민주화를 외치고 ‘전두환 타도’를 소망하던 것은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고인돌, 청동기, 백자와 같은 유물로 ‘추측’할 뿐인 오래 된 역사가 아니었다.

사진과 영상 속에 남아있는, 여전히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는 ‘기억’이었다. 감옥에서 김진수와 함께 밥을 나눠 먹었던 그는 여전히 떠올렸다. 정좌한 채 눈동자조차 돌리지 못하고 숨죽여 있었던 그 감옥을, 모나미 볼펜으로 고문을 당하고 뼈가 드러난 손가락 사이 끼워져 있던 약솜을, 어쩌면 그것이 잊히지 않아서 술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기억이 두려워 김진수와 그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김진수는 죽고 그는 살았지만, 기억만큼은 진수의 몫도 그의 몫도 고스란히 남았다.

교복을 입고 뛰어다니던 은숙이 출판사 ‘김 양’이 될 세월 동안 5·18민주화운동은 왜곡되고 지워지고 다시 언급되고 비난 받고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광주의 외침을 이어 받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점심 시간 흰 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응원을 보냈으며, 살벌한 검열 속에서도 양심을 지킨 언론인들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 맞선 시민들이 있었다. 당시 옛 도청 일대에 진주한 계엄군과 헬기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시민들의 열망 속에 나라는 소용돌이 쳤다. 고문과 검열이 사라지고 거리를 메운 최루탄 냄새가 걷히고 여러 차례 대통령이 바뀌었다.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진수에겐 죽음이 남았고 은숙누나는 뺨을 맞았고 선주누나에겐 피를 흘리던 이의 얼굴이 남았고, 동호에겐 어머니의 그리움이 남았다.

80년대 격동의 세월을 지나, 2018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전 재산 29만 원으로 대저택에서 만찬을 즐기는 누군가가 남았고, 회의장에서 격투를 벌이는 국민의 대변자들이 남았고, 지역과 성별과 돈으로 편을 나누는 유치한 말싸움이 남았다. 또, 배 한 척이 남았고, 촛불이 남았다. 그리고 촛불을 드는 사람이 남았다.

▲“잊지 않을 것이다” 현재진행형 이니까

짧고도 긴 세월 속에서 그들은, 우리는, 정착하지 못하고 이제껏 유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주누나는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신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죄를 사하여 준다는 믿기 힘든 말이 거북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다는 앞의 대목이 더 불편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조차도 선주누나를 위로하지 못했을 뿐이다.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선주누나의 독백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지은 죄와 당한 죄, 선주누나는 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죄 속에 남아 우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동시에 선주누나도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2016년 미치도록 춥던 겨울, 추위를 뚫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광화문으로 충장로로, 총과 주먹밥이 아닌 촛불과 쓰레기 봉투를 들고.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성숙했던, 부패한 국가권력에 맞서는 국민들의 뜻이었다.

촛불을 타고 나는 거슬러 올라갔다.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으로.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한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온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도청을 지켰다. 여자와 어린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총을 든 시민군이 있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모여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오고 있습니다” 목이 쉬어라 밤새 외쳤던 이들이 있었다. 그 시간동안 치안과 질서를 지키는 성숙한 시민자치가 이뤄졌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현재 진행형이니까. 그 뜨거운 군중을 내 눈으로 보았고, 내 귀로 들었으니까. 그 날의 광주를 잊지 못한 소년은 내가 되고 나의 친구가 되고 우리가 되어 촛불을 들었다. 소년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
김솔 청소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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