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31년 이끌어
정부 외면 일제 피해자 명예회복 투쟁 앞장

▲ 이금주(李錦珠.1920)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일제에 남편을 빼앗긴 개인의 아픔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일제 피해자들을 보듬어 안은 이금주(李錦珠.1920)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30년이 넘도록 일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 온 그에게 정부가 국민훈장으로 늦게나마 예우를 표했다.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부터 지난해 대법원 승소 판결 등 많은 변화와 성과를 이끌어 낸 이금주 회장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제대로 조명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10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날 오후 2시 서울 페럼타워 3층 페럼홀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제 71주년 기념식에서 이금주 회장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모란장은 무궁화장에 이어 두 번째로 등급이 높다.

 이금주 회장이 쌓아온 공적의 중요성이 크다는 의미다.
 
▲광주유족회 일 정부 소송만 7건
 
 이금주 회장은 본인 또한 전쟁피해자의 유족이면서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은 대모였다.

 그의 남편 김도민 씨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 11월 군속으로 동원됐다 사망했다. 결혼 2년 만, 그것도 그해 3월 아들을 낳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끌려간 남편의 모습이 마지막이 된 것.

 이금주 회장은 남편이 끌려가던 ‘그날’의 구두 발자국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금주 회장은 이 아픔에 좌절하지 않았다.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전국유족회’가 발족하고 광주유족회 회장을 맡으면서 대일투쟁 전면에 나서게 됐다. 이때부터 광주·전남지역에 흩어진 유족과 피해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모아갔다. 그러다 재일교포 송두회 100인회(조선과 조선인들에게 진사와 보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촉진하는 회의 전신) 회장을 만난 것을 계기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한 법정 투쟁을 본격화했다.

 1992년 12월 군인, 군속, 노무자, 보국대 등으로 끌려간 피해자와 유족 1273명(1차 1089명, 2차 184명)을 모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대규모 집단 소송을 제기해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놨다. ‘천인소송’이다.
1994년 3월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양금덕 할머니, 고 이순덕할머니,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해방 후 돌아오다 수장된 우키시마마루호 폭침 사건 피해자들도 수소문 해 1992년 8월 81명의 원고와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해 12월에는 광주유족회 회원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부산·경남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10명의 원고들과 관부재판에 나섰다. 이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것이 2018년 6월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다.

 이후로도 1995년 5월 B·C 전범(포로감시원) 재판을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하고 1999년 3월에는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나고야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소송에 나섰다.
 
▲피해자들 사연 기록, 진상규명 토대
 
 2006년에는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동안 광주유족회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직접 제기하거나 참여한 소송만 7건. 특정단체가 다름 아닌 일본 정부를 상대로 7건의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사례가 없다.

 특히, 우키시마마루호 폭침 사건, 관부재판은 1심 승소라는 역사적 성과를 남겼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운동, 포스코 한일 청구권자금 환수소송, 공탁금·우편저금·미불임금 환수운동, 태평양전쟁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진상조사 등 소송 외 다른 활동들에도 적극 나섰다. 정부나 정치권 누구도 일제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 목소리를 내고 투쟁을 일으킨 그 중심에 이금주 회장이 있었던 것.

 싸움은 매우 힘들었다. 이금주 회장이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 하지만 우리 정부 누구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다 할 사회적 뒷받침 없이 이금주 회장과 피해자, 유족들은 오로지 의지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해야 했다.
이금주 회장이 남긴 기록물. 위부터 일기장,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주고 받은 서신 봉투,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들.

 열악한 상황에서 제기한 소송마저 매번 패소로 끝났지만 이금주 회장은 좌절하는 법을 몰랐다. 기각만 17번. 일부 회원이 낙담하고 포기하려 할 때 이금주 회장은 이들을 다독이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 불굴의 의지는 결국 많은 변화와 성과로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한일협정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돼 정부 차원의 피해자 신고 업무와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금주 회장이 기록한 피해자들의 사연은 이 과정에서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각종 재판 서류와 피해자 신고 목록, 활동자료, 사진, 일기장 등은 앞으로도 ‘태평양전쟁광주유족회’ 활동사 정리, 자료집 발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등 관련 분야 학술연구, 역사교육 자료 개발, 역사 계승 사업의 중요한 밑바탕이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포기 모른 31년, 인권·정의 지평 넓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이 국내에서 본격화되고 지난해 대법원 승소 판결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 것 역시 이금주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2013년 11월 광주에서 진행된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소송 1심에서 승소하자 이금주 회장(왼쪽)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함께 만세를 외치며 기뻐하고 있는 모습.

 시민모임은 “역사적 투쟁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바로 이금주 회장이었다”며 “이금주 회장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있었기에 일제 피해자들의 투쟁이 이만큼 올 수 있었고, 인권과 역사정의에 대한 사회적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도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훈장을 통해 이금주 회장의 활동과 그 노력에 예우를 표한 것이다.

 시민모임 이국언 대표는 “31년이라는 눈물과 통한의 세월 속에서 이금주 회장이 정치권 무관심에서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기 때문에 일제 피해자들 문제가 한일간 외교적 현안이 되고 국민적 관심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유족으로 한과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 다른 피해자들을 부여 안고 지금까지 왔던 것들에 대해 늦게 나마 우리 사회와 국가가 예우를 보인 것 같다”며 “이금주 회장에 대한 사회적 조명이 이뤄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훈장 수여가 이금주 회장의 역할과 공적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알려지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인 이금주 회장이 남편과의 결혼식 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 이금주 회장의 남편은 일제강점기 군속으로 동원돼 사망했다.<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한편, 이금주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몇 년째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이날 국민훈장 수상은 투병중인 이금주 회장을 대신해 손녀 김보나(51) 씨가 대리 수상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대신해 김철홍 광주인권사무소장은 11일 오전 이금주 회장이 투병 중인 요양병원을 찾아 이 회장에게 훈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강경남 기자 kkn@g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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