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논평

“절대 운영자와 주동자 몇 명에 대한 처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부와 국회, 사법당국이 모두 이 사건을 심각한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지하고 가담자 전원에 대한 처벌은 물론,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텔레그램 ‘엔(n)번방’ 성폭력,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운동단체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이하 셰어)’가 입장을 밝혔다.

셰어는 23일 ‘논평’을 통해 “이 문제는 강력한 처벌과 사법조치만으로는 근절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면서 “경찰과 검찰 등 사법당국과 정부는 강력한 단속과 처벌 의지를 밝히는 데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이러한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에 일조해 온 책임 또한 통감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과제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셰어는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네 가지 지점을 반드시 고려하라고 요구했다. 음란의 문제가 아니고 폭력의 문제라는 점, 아동·청소년만을 피해자로 전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피해자들이 어떠한 낙인이나 처벌·피해사실 공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신고와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 성적 권리에 대한 인식과 자원의 기반을 기초부터 새롭게 다져야 한다는 점이다.

셰어는 “이미 매우 심각한 수준의 폭력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디지털 성폭력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온 여러 단체와 전문가들이 수차례 구체적으로 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문제가 이렇게 가볍게 취급되어 온 이유는 국회와 사법당국조차 이 문제를 폭력의 문제가 아닌 음란물의 문제로만 인식해왔기 때문”이라면서 “국회 국민동의청원으로 올라온 일명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의 법사위 논의 기록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n번방 관련 청원 요구사항인 국제 공조수사, 디지털성범죄전담부서 신설, 양형기준 재조정 등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고 의원들은 주로 딥페이크 영상물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면서 이 문제를 음란물의 제조와 유포에 관한 처벌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관해 논의했다”는 것. 셰어는 “이는 처음부터 논의의 틀이 잘못 짜여진 것으로 딥페이크 영상물을 포함하여 디지털 성범죄 촬영물은 음란의 문제가 아닌 폭력의 문제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셰어는 “표현물의 노출 수위나 제3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촬영, 유포, 판매 등의 과정에서 당사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기 개입된 협박, 갈취, 신체적·정신적 폭력 행위 등이 있었는지의 문제가 쟁점이 되어야한다”면서 “향후 이 문제를 음란물이나 표현물의 규제 영역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로서 다룰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셰어는 또 현재 텔레그램을 이용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주로 아동·청소년에게 집중되어 있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셰어는 “아동과 청소년 피해자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면 가해 사실보다 피해자의 유형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전제는 피해자가 누구이든, 어떤 성적 욕망을 표현했든 간에 당사자의 자율적인 합의와 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는 폭력이라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순수한 피해자’ 상을 전제하지 말고 폭력 행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피해자들이 언제라도 낙인이나 처벌, 피해사실 공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도 주문했다. 셰어는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탁틴내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디지털성폭력피해자지원센터 등에서 피해자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폭넓게 알릴 필요가 있으며 또한 이 과정에서 부모나 다른 지인에게 상담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알려져야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셰어는 “성에 대한 인식과 자원의 기반을 근본부터 재편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셰어는 “한국 사회의 성담론은 아주 오랫동안 검열과 단속을 중심으로 작동하거나, 권리와 자원은 없이 개인의 자유만이 강조되는 양극단 속에 놓여 있었다”면서 “성적 권리가 무엇인지, 이러한 권리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보장이 무엇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셰어는 “개인의 삶과 생존, 사회경제적 자원과 권력의 문제로부터 따로 떨어진 성의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 주거, 연애, 결혼, 가족구성,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 돌봄과 성의 문제는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서 “이러한 인식이 성교육에서부터 국가 정책과 법 체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