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기폭제는 5·18로 촉발된 민주화 열망”

▲ 영화 ‘1987’ 포스터.
 영화 ‘1987’이 ‘광주의 오월’을 호출하고 있다. 그해 6월 뜨거웠던 민주화투쟁의 도화선이 광주의 ‘핏값’임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5·18과 6월 항쟁 사이엔 7년의 간극을 메우는 민주주의의 피가 흐른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투쟁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다. 박종철 고문 살해의 실질적 책임자인 전두환을 향한 외침이었다. 그는 1980년 광주시민들을 짓밟은 주범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또 다시 민중들을 좌절시켰다.

 6월 항쟁을 생생하게 목도한 서일환(전남대 85학번) 씨는 “권력 탈취한 정권에 저항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망이 7년 만에 다시 불 붙은 형국이었다”며 “학생운동으로 시작된 응집력이 시민사회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고 회고했다.
 
▲“반독재 투쟁 7년만에 불붙어”

 항쟁은 그 해 5·18을 거치며 더욱 증폭됐다.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다. 앞서 4·13 호헌 조치로 직선제 개헌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좌절감은 5·18을 복기하는 결정타였다.

 특히 6월9일 ‘광주의 아들’ 이한열 열사 피격 사건은 광주를 또 한 번 들썩이게 했다.

 이 열사의 광주 진흥고 2년 후배였던 안평환 광주도시재생센터 대표는 학교에 들어온 운구차를 맞이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주된 시위 장소였던 광주 도심과 가깝게 살고 있어서 항쟁의 현장을 듣고 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며 “나 뿐 아니라 광주시민들은 1980년을 기억하고 또 희생의 아픔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을 계기로 5·18에 대한 오해도 차츰 풀려갔다”면서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항쟁 과정에서 5·18 관련 비디오를 시청하고 사진전이 열리는 등 5·18의 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1980년 이후에도 저항의 불씨는 사그라 들지 않고 타올랐다. 5·18의 진상규명 투쟁이 핵심이었다.

 조선호 광주전남 6월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6월 항쟁은 5·18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강화돼 전국화된 과정이 있다”며 “6월 항쟁의 본질은 5·18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광주로 묶이는 자부심, 공감대 응축”
 
 그는 “엄혹하던 80년대에도 매년 5월이면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망월동 묘역을 찾고, 옛 전남도청을 찾았다”며 “7년간의 싸움이 강화되고 응축돼 6월 항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봤다.

 당시 전남대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박춘애 진남중 교사도 “광주로 묶이는 자부심과 공감대가 있었다”고 6월 항쟁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긴 생머리를 자르고 삭발한 최초의 여대생이었다.

 “광주는 매년 5월이면 5·18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선 6월에 들어서 투쟁이 거세지는데, 광주는 5월 절정을 지나 6월이 되자 지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사태 전환을 위해 5·18광장에서 삭발을 했어요. 이후 분위기는 더욱 엄숙해졌고 매일매일 가두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는 30년 만인 지난해 ‘6월 항쟁 기념식’에서 항쟁 당시 입었던 옷을 입고 기념식 사회를 보기도 했다.

 “역사는 그 자체로 남았지만, 세월이 흘러 그 자리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당시에는 시위 자체가 불법이어서 게릴라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삼엄했거든요. 촛불혁명까지 거치면서 발전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5·18과 6월 항쟁을 잇는 저항의 불씨는 30년 후 촛불항쟁으로 옮겨 붙었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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